농업(농사교도사업·4-H) 관련 통상 용어 정리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1920년대 한국 부녀자들의 동경(憧憬)의 대상이었고, 한반도의 산업혁명(재봉틀 관련 피복 공업, 섬유 산업)을 이루어낸 ‘재봉틀(Sewing Machine)’을 만경생의 고향인 함경도 지방에서는 흔히 ‘마선’이라 불리었다. 즉 ‘기계’라는 ‘머신’이 변형된 지방 사투리로 통용된 것이다.
우리 한글의 우수성(발음과 표기)은 세계 여러 나라 언어 중에서도 탁월하고 발음의 정확도는 거의 99.9%라고 언어학자들은 말한다. 일본 사람들의 발음 수준은 아직 수준 이하로서 영어의 ‘Taxi’를 ‘타꾸시’로 우리나라 고유 식품인 ‘김치’를 ‘기무치’로 사용하는 언어의 ‘발음 열등국’이라 하겠다.
우리 한반도 농업사(고려, 조선, 일제 강점기, 6.25한국전쟁 후인 1950년대까지)를 살펴보면 우리 주식인 밥의 재료가 되는 ‘쌀(벼 껍질을 벗긴 알맹이)’도 그 표현이 ‘답(畓穀, 秋穀)’, ‘답농(畓農)’, ‘나락(탈곡하지 아니한)’, ‘미(米)’, ‘멥쌀’ 등 다양하게 표기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들이 내포하고 있는 성질은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농업표기, 발음, 형태를 영어 등 광범위한 한·영 농업관련 언어·표기를 표준화하기 위한 작업이 1953년 농림부, 문교부 관계관과 KCAC 식량농업국, 동 문교관계 고문, 농업시험장 관계관으로 구성된 소위 ‘한·영 농업관련 언어·표기 정비위원회(만경생이 실무대표)’를 3개월간 발동시킨 바 있다. 당시 국가적 대난리를 파상적으로 맞이한 대한민국은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4-H운동과 농사교도사업의 미래를 대비하여, 우선 각종 농업 전반에 대한 표기와 한·영 언어의 정리에 통일된 언어와 글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되었다.
8·15광복과 6.25한국전쟁은 정화되지 않은 외래어의 대홍수 시대였다. 만경생은 미국의 원조기관에 근무하면서 각종 문서 번역과 통역 등에 많은 어려움을 겪은 바 있다.
물론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하였으나 사회 초년생으로 근무할 당시에는 한국 농업에 대한 지식은 더욱 희박하여 초기에는 실력도 무척 미흡했다. 특히 농업관련 영어 구사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기 위원회는 3개월 기한으로 매 2주에 한번씩 KCAC에서 전체회의를 개최하여 중요한 사안에 대해 계속 논의하고 토의해 나갔다. 일례를 들자면 연찬회(硏鑽會, Workshop, 당시에는 그리 흔한 용어가 아니었음)의 ‘찬(鑽)’ 자를 쇠 금(金)변으로 하느냐, 말씀 언(言)변의 찬(讚)으로 하느냐에 논의 시간 전부를 소진하는 때도 있었다.
만경생(당시 상기 위원회 업무주관)은 미리 종합 수집한 언어를 타자하여 각 대표에게 배포하고 1독 후에 끝나는 정도의 회의였다. 당시 정부 관료들과 학계는 영어라면 우선 거부감부터 갖는 것이었다.
일제시대 10년간에 걸친 중등대학의 영어공부는 주입식으로 당시에는 이상한 일본식 발음으로 읽기는 지장이 없었으나 독자적 의사 표현과 회화의 구사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문화 도입과 선진과학 교육의 육성, 학술적 선진화 그리고 우리가 지금 시급하게 정리하게 된 농업영어와 우리말의 적절한 연결성 및 표현 등은 매우 시급했다.
우리들은 우선 과거 1000년전(AD317~1945년)의 농업사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역사적 예를 농사교도사업과 유사한 사업과 관청 명칭 즉 고려시대부터의 농업기술지도부터 분석하기 시작했다. 신라 왕조가 붕괴되고 그 후 약 1000여 년간은 고려와 조선 2개의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 두 왕조 시대에는 농업경제에 있어 여러 형태의 발전상이 나타나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왕조 교체 시에 정책상의 개혁이 수반됐으며 사회제도 면이나 생활양식 면에서도 적지 않은 전환이 있었다.
다음 호에는 국·영 그리고 옛 한자 표기 등을 간단한 예로 나열하며 우리 선조들의 농사 교도사업과 농민들의 후생·복지 직무를 담당한 기관명과 활동을 간략히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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