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2-01 격주간 제846호>
[지도자 탐방] 살기 좋은 농촌 만들기에 앞장선 농업계 야전사령관

임 수 진 자문위원 (한국4-H본부)

임수진 자문위원은 4-H회원을 거쳐 농촌운동에 젊음을 바쳤고, 한국4-H연맹 부총재, 3선의 진안군수와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을 역임한 자랑스러운 4-H인이다.
4-H라는 말만 나와도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사람이 있다. 4-H인들만 만나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사람이 있다. 4-H를 말할 때면 목소리가 떨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임수진(73) 한국4-H본부 자문위원이다. 그는 4-H회원을 거쳐 농촌운동에 젊음을 바쳤고, 한국4-H연맹 부총재, 3선의 진안군수와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을 역임했다. 요즘 그가 자주 머물고 있는 전주시청 근처의 ‘인산가(仁山家)’를 찾았다.
그는 지난해까지 전북의정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현재 전주YMCA 이사장을 맡고 있다. 바쁜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진안의 6600여㎡에 농사를 짓는 것이 그의 본업이다. 그는 공직을 마치면서 ‘죽어도 논두렁을 베고 죽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했다.
돌아보면 임수진 자문위원의 70평생은 살기 좋은 복지농촌을 만들기 위해 땀 흘린 세월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작은 청소년시절 무서운 줄 모르고 열정을 불살랐던 4-H활동이었다.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산리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의 휘문중·고교를 졸업했다. 그의 꿈은 군인이었다. 수시로 태릉의 육군사관학교에 놀러갔다. 그래서 ‘임생도’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고3 때 도봉산 암벽을 오르다가 떨어져 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것이 피부질환이 돼 사관학교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좌절한 그는 병이 나으면 다음해 다시 응시하기로 마음먹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피부병이 쉽게 낫지를 않아 군복무가 면제됐다. 진로를 바꿔 4-H를 하면서 농촌에 정착하기로 했다. 육군사관학교대신 ‘4-H사관학교’에 입학한 셈이다. 고향마을인 좌산리에 무궁4-H구락부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맡았다. 이때가 1968년 6월 14일이었다.
“협동·봉사·개척으로 무지와 가난을 몰아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다. 군수가 쓴 ‘협동’, 농촌지도소장이 쓴 ‘봉사’, 경찰서장이 쓴 ‘개척’이란 휘호를 사무실에 내걸었다. 체육대회는 협동정신으로 기마전, 봉사정신으로 업고 달리기, 개척정신으로 장애물 경기를 가졌다.
50여명의 회원들로 ‘모내기공동작업반’을 조직했다. 매일 40여명의 회원이 나왔다. 매년 농촌일손돕기를 실시해 큰 성과를 거두었다. 논과 밭에 뽕나무를 심고 앙골라토끼를 길러 소득증대에 나섰다. 농번기에는 탁아소를 운영했다.
1969년에 진안군4-H연합회장, 1970년에 전북4-H연합회장으로 활동했다. 군연합회장 시절에  4-H가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기금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100만원의 기금조성운동을 벌였다. 자력으로 30만원을 만들어내면 독지가 등으로부터 후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임 자문위원이 회장을 맡았던 임기 중에 23만원을 조성했다. 이 종자돈은 농촌지도소에서 잘 관리해 상당한 금액으로 불려놨고, 이후 진안군4-H기금의 밑바탕이 되었다.
4-H회원 활동을 마친 임수진 자문위원은 1971년 당시 농촌운동을 힘차게 추진하고 있던 농촌문화연구회(회장 김일주)를 찾았다. 전국에서 모범적인 4-H활동을 펼쳤던 젊은 동지들이 거기 다 있었다. 이때 임 자문위원은 경기 광주 신장에 있는 ‘선린협동촌(촌장 김성도)’을 방문하게 된다. 모두가 협업·협동으로 농사를 지었다. 닭을 기르고, 거기서 나온 분뇨를 거름으로 활용하는 순환농업을 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 농업과 농촌이 지향해야 할 본보기가 아닐 수 없었다.
선린협동촌은 최고의 농업기술로 메론을 생산했다. 마을 가운데 있는 회관에 신용협동조합이 있어서 농산물을 공동 구매 및 판매를 했다. 농민들은 농사만 잘 지으면 되었다. 회관 옆에 있는 농구코트에서 주민들과 청소년들이 체육활동을 했다. 주일이면 기독교, 천주고, 원불교 등이 시간 순서에 따라 회관에서 예배를 드렸다.
임 자문위원은 고향마을로 돌아와 신협을 만들고 ‘씨샘협동촌’을 구성했다. ‘샘의 씨가 되자’는 의미였다. 복숭아과수원을 만들고 논과 밭의 공동경작 등을 준비했다. 그런데 농촌문화연구회 김일주 회장이 함께 일하자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김 회장은 휘문고 9년 선배이기도 했다. 결국 그는 선배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고 8년간 농민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농업인 육성을 통한 농업인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힘썼다. 특히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농업인교육프로그램을 통해 특작마을을 개발했다. 선린협동촌의 정신을 살린 양곡은행을 설립해 ‘쌀빚’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돕기도 했다. 기독교농민회, 가톨릭농민회의 설립과 운영 등에도 참여했다. 1991년 이들 농민단체가 통합해 만든 전국농민회총연맹이 출범할 때 의장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군사정부시절 노동운동과 함께 농민운동 또한 탄압을 겪게 된다. 1979년 오원춘사건과 크리스찬아카데미사건으로 임 자문위원은 용공·좌경으로 내몰렸다. 고향으로 내려와 씨샘공동체 정신의 구현에 나섰다. 민주화·협동화·인간화를 마을개선의 목표로 삼았다. 먼저 아이들의 교육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좌산어린이동산을 만들었다. 마을공동산에 흑염소를 방목했다가 겨울철에 가공 판매했다. 고추작목반도 만들어 소득을 높여나갔다.
이렇게 고향마을에 머물다가 1985년에 진안읍으로 나왔다. 김규형, 송영선 등 4-H동지들이 공동출자해 사무실을 만들어주었다. 여기서 삼남관광영업소를 운영했다.
임 자문위원은 46세 되던 1991년에 전북도의원에 출마했다. 당시 호남지역에서 평민당이 아닌 무소속으로는 유일하게 당선됐다. 1995년에는 진안군수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3선의 군수로 재직하면서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한 CEO군수로 활약했다. 전국 최초로 ‘으뜸마을가꾸기사업’과 ‘마을간사제도’를 추진해 전국적인 혁신모범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
군수 퇴임 후에는 ‘농사를 지어야 농사꾼’이라는 생각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시골에 가만히 머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2007년 한국농어촌공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한국농어촌공사가 21세기 농촌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정책추진 주체로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힘썼다. 그 결과 고객만족도 1위, 경영평가 2위를 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임 자문위원은 4-H회원에서 농업운동가, 관료, 기관장 등을 거치며 농업계 야전사령관으로 살아오는 동안 어느새 70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다시 농업인으로 돌아와 땅을 일구고 있다. 한국4-H운동이 70주년을 맞는 올해, 4-H역사에서 ‘임수진’이라는 이름은 바로 살기 좋은 복지농촌을 만드는데 자신을 불사른 ‘자랑스러운 4-H인’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조두현 사무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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