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이 담긴 봉사의 가치 〈2〉
-한국 4-H 자원지도자 유래와 활동 -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1953년 1월 농림부와 KCAC 식량농림국은 지도사업 추진 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강습회를 개최했다. 과거 각급 지도자 강습회에 참가한 수강생과 새로 모집한 전국 지도요원 3만6000명을 중앙(부산원예시험장)과 각 시군에서 연장강습회를 개최하여 지도자 양성에 노력하였다. 반면 중앙에서는 국회와 농림부 등 핵심 기관과 관계 부처에 농사교도사업 추진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면서 1953년 12월 관계 장관 명의인 ‘농업교도사업 실시에 관한 통첩’이 행정 말단까지 시달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지도요원들의 신원 보장과 보수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말단 지도요원들의 사기는 실추되기는커녕 오히려 지속적인 상승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전화위복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개인적인 영달보다 마을 발전과 청소년 육성체인 4-H운동에 몸 바쳐 지도자로 나서기를 결심했던 것이다. 6.25 한국전쟁 중 이들은 노무자(지게부대)로 징용될 위험도 높았지만 무보수로 부락지도요원으로 자원하였다. 지방장관이 임명하는 특혜 이외는 아무런 지원이 없었다. 결국 이들은 지도자라는 직함으로 활동했지만 공무원도 자원봉사자도 아닌 어중간한 역할과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전쟁 종결과 정부 환도 등으로 사회질서가 점차 회복되었고 현대적 농사교도사업 설정 계획이 확실시 되어 갔다. 동시에 일선 지도요원들은 자신들이 미래 지도공무원으로서의 자격이 미비하다는 것을 자각하여 부락에서 우선 청소년들을 규합하여 4-H클럽을 조직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각급 행정 기관에서 시달되는 무질서한 업무 행태에 흥미를 잃고 점차 지도요원에서 이탈하였고, 날이 갈수록 그 수가 많아졌다. 한편 4-H클럽운동에 대한 관심은 기대 이상이었다. 이런 경향을 감지한 KCAC(만경생 주무)와 농림부 계장(정용석, 후일 경남·북, 충북도원장)은 중앙 4-H자원지도자 강습회(1956년 청량리 원예시험장)를 개최하여 4-H 자원지도자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4-H지원 활동의 내실 강화 및 지도자로서의 자질 향상을 꾀했다.
전국 여러 부락에서 흩어져 활동하던 4-H자원지도자들은 인근 마을과 군·도내에서 지역 4-H자원지도자연합회를 자체적으로 조직, 확대한다. 또한 상호이해 촉진과 정보교환, 지역별 4-H행사 지원 등을 후원하면서 연합회 활동이 대형화된다. 1957년 농사원 발족 후에는 더욱 다양한 분야에서 영농클럽과 생활개선클럽활동을 중심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후 1973년 4월 전국농촌지도자중앙회, 1976년 12월 새마을영농기술자중앙회로 2회에 걸쳐 개명하면서 농촌 현대화의 역군으로, 총 4만6000명의 막강한 농촌 민간단체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농민들의 어두운 시절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한 4-H자원지도자들의 숨겨진 저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953년 전국 지도요원 강습회 개최 당시 중요하게 선택된 강습 과목은 농촌지도사업에 대한 이념과 취지, 목적 등이었다. 당시 우리는 만성적 빈곤과 폐쇄적 농촌 분위기를 감안하여 지도요원들에게 4-H자원지도자 활동을 권할 단계가 아니었다. 1900년대 미국 농촌 지역사회의 학교 교장, 교육감, 중등학교 교원, 농업단체 독지가들의 노력에 의한 4-H지도 행위가 각종 어린이 농업학습클럽 지도와 후원에 기여한 미국의 선례를 소개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3~57년 사이에 4-H운동은 전국적으로 급속도로 파급되었고, 전국의 ‘4-H자원지도자’들의 활동은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이처럼 지도자 수가 우후죽순 성장하는 것을 본 미국 원조 당국자들은 놀라기만 했다. 그들은 한국인들의 특성인 ‘빨리 빨리!’와 ‘척하면 삼천리’를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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