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오래 살던 친구가 시골로 이사를 갔다.
그녀는 오랜 교수 생활을 접고 남편과 함께 꿈에 그리던 단독주택을 사서 시골로 내려간 것이다. 벼르고 벼르다 친구와 함께 찾아간 곳은 용문역에서도 30분을 더 달려야 하는 산골이었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엔 겨울햇살이 누워 뒹굴고 있었다. 집은 나무와 황토로 지어져 있었고 거실 깊숙이 햇살이 들어와 있었다.
나는 병든 강아지처럼 거실바닥에 엎드려 햇볕을 쬐었다. 트라이앵글 소리가 나는 겨울햇볕은 쌓아둔 쌀가마니처럼 욕심이 났다.
거실 유리창 밖은 사방이 비어 있어 오랜만에 눈이 시원했다.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우린 오랜만에 여유로운 점심을 먹고 산책을 했다. 팔을 벌린 산줄기가 동네를 감싸고 있어 어디로 가든 산의 품속으로 들게 되어 있었다. 산길은 낙엽에 덮여 푹신했고 떨어진 밤송이나 도토리도 한가로이 명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욕심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달고 시원하고 뼛속까지 싸해지는 그 옛날 고향의 맛!
친구는 실로 부자였다. 햇볕이나 공기가 돈이라면 그것들을 물 쓰듯이 쓰며 살고 있지 않은가? 상념에 젖어 친구들 뒤를 따라가다 고개를 들고 나도 몰래 웃고 말았다.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뒷짐을 지고 가는 게 아닌가! 그 모습은 무성영화처럼 고요하고 겨울나무처럼 아름다웠다.
얼굴이야 화장을 하거나 성형을 하거나 울고 웃거나 하며 거짓을 말할 수 있지만, 꾸밀 수 없는 뒷모습은 진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앞모습을 능가하는 뒷모습도 있는 것이다. 내가 따라가며 사진을 찍어도 낄낄거려도 신경 쓰지 않는 친구들의 뒷모습.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한 남자를 떠올렸다.
앞모습을 미련 없이 버리고 홀홀하게 살다 가신 아버지. 아버지가 치매로 요양원에 있을 때였다. 공기 좋은 산정호수 쪽에 친척 오빠 부부가 요양원을 해서 그곳에 모신 때였다. 엄마와 같이 갔는데, 아버지는 엄마를 보자 얼굴이 붉어져서는 앉은 자리에서 절을 하셨다. 그리고는 어색한지 나에게 자꾸 눈짓을 했다. 아버지는 내 귀에 대고 아주 곤란하다는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금래야, 저렇게 늙은 걸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냐?” 아버지와 나는 예전부터 농담을 워낙 잘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는 내 이름만을 기억했다. 그때 마침 오빠랑 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아버지, 저렇게 젊고 예쁜 색시 데려다 줄까?” 아버지는 웃으며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옷매무새를 다듬고 엄마에게 종이와 연필을 내밀며 정중히 말했다. 주소나 적어놓고 가시라고 다음에 연락드리겠다고. 나는 키득거렸지만 왠지 그때의 아버지가 가장 순수하고 인간적인 모습으로 남아 있다. 체면도, 나이도, 아버지라는 이름도 벗어버린 한 남자의 뒷모습. 사람은 앞모습으로 만나 뒷모습으로 헤어질 때가 있다. 나는 그때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왠지 따듯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돌아오는 길에 핸드폰 속의 사진을 보았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친구들의 뒷모습. 어쩌면 뒷모습은 남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볼 수 없는 나의 뒷모습이 가깝고도 먼 타인처럼 궁금해졌다. 〈김금래 / 시인〉
※지난호(1.1자) 7면 ‘우리꽃세상’ 코너의 사진은 해당화가 아닌 ‘붉은인동’으로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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