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15 격주간 제845호>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24)

진심이 담긴 봉사의 가치 〈1〉
-한국 4-H 자원지도자 유래와 활동 -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농업은 자연의 지배를 크게 받는다. 그러나 이 자연적 요인을 인위적으로 반드시 정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고 노동, 기술, 과학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생산목적을 유리하게 적응시킬 수 있다. 이와 평행하여 근래 ‘사람과 사람’ 즉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부상조적 공동체 활동이 지역발전뿐만 아니라 개개인의 능력 발전과 복리증진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옛 사람들이 노동력에 의한 합력인 ‘두레’와 노동의 교환인 ‘품앗이’는 독특한 인간 대 인간의 협동의 유형이라 하겠다. 그 개념에서 지도자 성격과 피지도자 관계를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본인이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도우려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도 무보수로. 그리고 6.25한국전쟁과 같은 국가적 대재난을 겪은 사회혼란 속에서 인간적 도의심이 취약한 시대에 말이다! 당시 농촌에서는 마을 보리밭과 논두렁을 유일한 놀이터로 삼고 특히 겨울 농한기에는 허송세월을 보내는 시골 청소년들의 천진난만한 생활을, 들풀처럼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다. 이들의 장래에 새로운 희망과 향상된 삶의 힘을 유도하기 위해 숭고한 봉사를 다짐한 독지가들이 농촌사회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로 4-H자원지도자들이다. 1950년대 초 우리의 신세는 초라했다. 전국 인구 대 농가 인구비는 65%, 농가 호수 223만4000호, 호당 경지면적 8600㎡인 가난을 빼면 사실 목가적 조용한 농촌이었다. 뿐만 아니라 감수성이 가장 높은 청소년층(10~20세) 인구는 510만명으로 이 가운데 각종 학교 취학생은 불과 125만명, 미취학 청소년은 385만명이라는 통계는 우리 농촌사회에 더욱 불길한 예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대한민국의 미래상에 심각한 어둠을 던지고 있었다.
바로 이런 암흑기에서 탈피하고자 정부가 추진한 것이 지도사업이고, 말단 부락에서 이 모든 것을 일거에 현실화 한 독지가가 바로 4-H자원지도자들인 것이다. 이들은 누구의 지시나 강요에 의해 자원지도자라는 직무를 맡은 것이 아니었다. 자원지도자들은 살기 좋은 농촌 건설이라는 순수한 의지로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의 한국 원조당국인 KCAC(Korea Civil Assistance Command, 한국 민사원조사령부)는 해방 후 지하 깊숙이 동면 상태에 빠진 한국농사교도사업(4-H운동을 선봉으로 하여) 추진에 재시동을 걸었다. 중앙에서는 국회를 비롯 정부 관련 부서와의 접촉을 적극 전개하면서, 여러 영농 과제 안내 소책자 발행과 함께 그것을 적기에 전국 농촌에 배포(1951년부터 농사원 발족시인 1957년까지)했다. 우선 농사교도사업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농민들이 이해하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일면 과거의 전국 농사지도요원 훈련을 격려하면서 사업 추진 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제로베이스(Zero base)에서 모든 것을 재검토했다.
KCAC는 자체 기구 내에 식량·농림국을 설치(주요 부서 : 농사교도사업 설정부/농홍보/4-H, 산림, 비료/농약, 농기계, 원조식량 관리, 토양관리와 개량, 축산/방역)하고 농림부와 긴밀히 협조하는 동시에 각 도에 고문관실을 개설하여 지방 행정과 복구사업에도 여러모로 협조했다. 동 사령부는 토양분석전문가 Dr. Fairchild로 하여금 한국의 노쇠한(토양산성화) 토양 검사를 농업시험장과 협조하여 전국에 걸쳐 완료(1952~54년)하고, 대책 마련에 착수한 바 있었다. 이 산성토양 사업은 1957년 농사원 발족과 동시에 농촌마을 4-H자원지도자들 협조를 얻어 여러 지역(특히 보리밭 석회 살포)에 시범적으로 비교 전시포를 설치했다. 이를 통해 산성토양 중화를 실험하면서 그 효과를 농민들에게 파급 및 체험시키며 농사교도사업의 취지와 목적 그리고 ‘영농이익(수확증대)’을 납득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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