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1-01 격주간 제844호>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23)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솔직히 고백하건데 1950년대 초, 농사교도사업 설정(4-H운동 포함)의 현지 추진 활동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장비와 숙련된 인력의 부족은 물론이고 가장 중요한 농민들과의 교감을 얻는데 우리들은 한계를 느꼈다. 오랜 세월 억압과 가난, 불평등 속에서 살아온 우리 농민들의 설움은 자연 폐쇄성과 배타적 사회 심리적 정서로 응결돼 있었다. 이들의 밝은 미래에 대한 잠재력을 재유출(再誘出)한다는 것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우리는 도전정신을 발휘하여 농민들의 공명을 얻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냈다. 무작위 개인 접촉, 즉 맨투맨 작전과 집단 및 대중 접촉(주로 슬라이드 영사기, 활동사진 활용)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각종 최신 영농기술 관련 인쇄물(팸플릿, 리플릿, 포스터 등)을 배포해 농민들의 자연스러운 관심을 유도했다. 지도사업에 대한 당위성은 점차 호평을 얻게 된다. 우리는 사명감을 갖고 일을 수행했다. 성과는 기대를 웃돌았다. 1957년 농사원이 발족할 때까지 많은 농민들은 농사지도사업에 대해 공감을 갖게 된다. 농촌의 의식구조 변화도 큰 영향을 가져왔다. 2개의 사례를 소개한다.
사례1) 65년 전 가을 어느 깊은 밤 만경생은 충남 부여군 구암(금강변) 작은 부락 이장 댁 어두운 등초롱 아래 빈곤에 쪼들린 부락민 7~8명과 작은 교자상에 둘러앉았다. 경직된 마음을 활짝 열기를 바라면서 지도사업 설명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부락민들은 타 지방 농민들이 그렇듯 외지인, 특히 정부 관리들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심어린 설득을 통해 드디어 젊은 ‘한양 손님!’에게 이들은 가슴을 활짝 열게 됐다. 이후 만경생은 충남 및 전남·북 지방 출장 시 반드시 이 부락을 방문해 부락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사례2) 어느 늦은 겨울날, 만경생은 부산행 야간급행열차에 몸을 실었고, 한 농민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그는 3개월 전부터 서울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고향인 안동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는 피곤한 기색이었고 어딘가 강한 경계심을 풍겼다. 만경생은 명함을 주며 농촌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소개하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 젊은 농부는 고향에 노부모, 부인 그리고 3세 남아로 이뤄진 가족이 있었다. 그는 다섯마지기의 땅에 농사를 지었지만 늘 빈곤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의 인생관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1943년 8월 악명 높은 일본 제국군에 강제 징용이다. 그는 남태평양 여러 섬을 전전하며 비행장 건설 등에 동원됐다. 그리고 사이판섬에서 구사일생으로 미군 포로로 붙잡혀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 7개월간 수용 된 후 30세 되던 해 해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부모를 도와 고된 농사일을 해왔다는 짧지만 비참한 이야기였다. 가혹한 일본 제국군은 철저한 명령과 복종만을 강요했다. 그는 사이판 격전 당시 공포와 굶주림과 마실 물도 없이 미군의 끝없는 폭격과 대형 함포사격에 많은 동포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했다. 장기간의 전쟁이 그를 완고하고 폐쇄적인 인간으로 만든 것이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만경생은 조심스럽게 농촌지도사업과 이를 통해 더 나아질 농촌과 농민의 삶 그리고 미래 희망에 대해 장시간 설명했다. 헤어지며 건네준 농사과제 인쇄물을 통해 농촌 지도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1년 후 만경생에게 엽서 한 장을 보내왔다.
‘선생님, 저희 부락에 4-H클럽을 조직하려고 제가 지도자로 지원했습니다. 약 20명 정도가 회원 가입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조언과 지원 바랍니다!’
한 때 모든 걸 포기했던 젊은 농부 권씨는 어느덧 가슴을 활짝 열고 새로운 인생길을 선택했다! 바로 새로운 삶, 새로운 농촌의 가치를 추구(追求)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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