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보 람 회원(전북 김제시4-H연합회)
25살 처녀농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믿어주는 인정받는 농부지만 내가 걸어 온 길은 험난했다.
18년 전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가죽공장을 운영했다. 부모님이 가죽공장을 운영했기에 뱃속에 있던 나는 ‘아토피’라는 피부병을 가지게 됐다. 부모님께서는 상태가 너무 심한 나를 데리고 전국의 병원을 돌아다니고 아토피에 좋다는 약은 다 구해다 먹였지만 별 차도는 없었다. 결국 서울의 큰 대학병원에서는 공기 좋고 물 좋은 시골로 내려가 사는 수밖에 없다는 진단을 받게 됐고, 그 해 터진 IMF로 겸사겸사 귀농을 결심하게 됐다.
몸은 아팠지만 긍정적인 성격 덕인지 시골 생활에 금세 적응했고 농촌이 좋았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과자나 피자, 치킨 등은 잘 모르고 자랐지만 텃밭에서 가꾼 건강한 농산물을 먹고 지긋지긋한 피부병인 ‘아토피’는 차도를 보이기 시작했고 학교도 다닐 수 있게 됐다.
초·중·고교를 거치면서 그냥 시골, 농촌이 좋은 것이지 내가 ‘농부’가 돼야 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그러다 고 3, 진로를 결정한 중요한 시기에 일이 터졌다.
바로 한해 농사를 저장하고 다음해 종자를 저장해둔 창고의 온도 조절 실패로 들어보지도 못한 5억여원의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앉게 됐다. 부모님께서 귀농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넉넉하고 풍요로운 삶은 아니었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환경도 아니었는데 한순간에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교복 살 돈이 없었고, 대학 등록금은 꿈도 못 꾸게 됐다.
그런 상황에 늘 집안 분위기는 전쟁터 같았고 행복하던 우리 가족의 화목은 깨져버렸다. 상황이 안 좋아지자 어머니는 나를 불러다 앉아 놓고 차분하게 이야기하셨다. “네가 농업을 해보는 건 어떻겠니?”라고. 나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자가 무슨 농부야!”라고 맞받아쳤다. 주말에 농사를 도우면서 ‘농업은 힘든 일’이라는 게 머릿속에 박혀 있었고,‘농사는 남자가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현명한 어머니께서는 “엄마, 아빠는 농업을 모르고 귀농을 해서 많이 힘들었다. 젊은 네가 농업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워서 농사를 짓는다면 더 낫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다. 몇 달을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그래, 해보자! 나는 젊어서 인터넷도 잘하고 또한 농대에 진학하면 정보도 빠르고 하니까 부모님이 하신 것보다 더욱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모님께서는 파격적으로 23세인 내게 농장의 대표를 넘겨주셨고,‘강보람 고구마’라는 브랜드로 창업까지 하게 됐다. 이름 없는 고구마 농장이 ‘강보람 고구마’라는 브랜드로 재탄생 하게 됐는데 주변 반응은 칭찬이 아닌 나를 향한 조롱과 시선들로 가득찼다. ‘내 길이 아닌가?’라며 자책하며 너무 많이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 시기에 나를 붙잡아 준 건 다름 아닌 4-H였다. 서로 다른 분야의 농업에 종사하지만 선배들은 내게 희망을 주는 말을 해줬고, 자신들이 겪어온 일들에 대한 진심어린 조언도 들려줬다. 그 조언들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줬고, 편견들을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을 만들어줬다.
마음이 단단해지니 ‘농업’에 대한 자부심이 생겼다. 그리고 사랑하게 됐다. 마음 먹기에 따라 지독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는 성장 시기였다.
‘여자라서’, ‘여자이기에’ 겪었던 차별은 오히려 나의 장점이 됐다. ‘여자’라는 세심함으로 고구마를 재배하면서 점점 많은 사람들이 응원해주고 힘을 더해주기 시작했다. 결국 ‘여자’라는 단점이 오히려 ‘희소성’이라는 장점으로 변모됐다.
4-H가 내게 주는 힘은 너무나 크다. 만약에 4-H가 없었다면 나는 그저 방황하는 ‘취준생’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농업을 통해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고 있는 중이다. 농업이란 것을 작게 보면 그저 농산물을 생산할 뿐이지만, 크게 보면 국민의 먹거리를 책임지는 막중한 산업이다. 선진국의 공통점은 올바른 농산물 생산에 있다. 우리 4-H인도 올바른 농산물을 생산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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