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관점에서 본 4-H운동과 농사교도사업(3)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가족은 전체 국가와 민족을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의 집단이다. 그 집단 안에서 아버지의 위치는 통치자나 다름없었다. 아이들, 특히 청소년들은 다음 세대를 계승할 존재들일 뿐만 아니라 기성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이어나가주길 희망한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교육이다.
과거 농촌에서 청소년들은 노동력을 보충해주는 역할과 동시에 국가에(옛 지방 영주에게도) 비상사태가 발생 시 생명을 바쳐야 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귀한 존재였다.
그러나 역사는 청소년들을 잘 돌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청소년들의 집단적 조직 활동은 그리 많지 않았다. 군사적 조직(농민 혹은 민병으로서) 외에는 말이다. 우리나라 신라시대(진흥왕, 540~576년) 중반부터 자연발생적 민간청소년운동으로서 대두된 화랑(花郞) 집단은 여러 기능을 갖고 있었다. 화랑은 이후 점차 국가제도로 활용되어 전국에 확산된다. 그리고 신라 사회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당시 화랑의 연령은 15~17세로 사회 지배계급인 진골로 구성됐고, 이들을 따르는 일반 평민계층 출신의 낭도들이 있었다. 그리고 정치적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청소년 교육은 주로 유교사상이 근본이었다. 중국 당나라(唐, 618~907년)로부터 전래된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부터 설립됐다. 서당과 함께 많이 파급된 향교(鄕校)는 고려와 조선시대 이래 주로 지방에서 관이 지원한 유학을 위주로 가르치는 교육시설로써 청소년들의 문필학습과 정서교육에 치중했다.
1850년대까지 미개했던 일본은 역시 서원과 사숙(私塾)이 성행하다 명치유신(메이지유신, 1867년)을 단행해 서서히 발달된 서구문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각종 신문명 중에서도 교육개혁은 눈부시게 진행됐다. 농업 면에서 토지매매 금지를 해제하고, 교육면에서는 교육구조를 새로 도입해 농촌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에 따라 새로운 학제를 채택하고 각 지방에 농업학교 설치에 전력투구했다.
당시 우리 한반도는 봉건적 조선 왕조 말기로 지도자들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쇄국론과 개방론 세력의 갈등으로 문호개방은 일본보다 근 반세기나 늦어진다. 이후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1년 한일 합병을 감행한다. 하지만 일본은 점차 관료주의, 국수주의, 군국주의에 빠져들다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전락한다.
일본은 대한제국에 여러 가지(사회, 정치, 교육 등) 개혁을 강력히 요구했다. 1905년 관립농업학교, 1906년 수원 농림학교 그리고 1910년 개량농업 보급(금융조합)과 각 도에 농업학교(중등 실습위주)를 설치해 일본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아래 산업 강탈이 시작됐다.
유럽의 문예부흥(The Renaissance) 당시 청소년들의 기초교육 혁신과 농업 교육을 역설하던 스위스의 페스탈로치(1746~1827, 교육개혁자, Pestalozzi J. Heinrich)는 첫 농업학교를 설립해 농업의 개량과 발전에 힘쓴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아 점차 농촌에서 청소년들의 교육문제가 관심을 끌게 됐다.
19세기에 들어와 전통적인 농사방법은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산업혁명으로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이 가속화되면서 농촌·도시 양쪽에서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했다.
이런 역사적 과정에서 농민들의 인간성 회복에 대한 갈망과 청소년 교육(사회교육을 위한)을 지향하는 조직적 활동이 1880년에서 1910년에 걸쳐 미국·유럽 농촌에서 자생적으로 만연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후일, 바로 4-H운동과 농사교도사업 출현의 근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농촌청소년사회 실천교육운동(4-H)은 강력한 시대적 조류(潮流)로서 전 세계 농촌에 파급될 것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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