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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격주간 제84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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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21) |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4-H운동과 농사교도사업(2)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고대 국가의 운명은 당해 농사의 풍·흉작으로 좌우됐다. 몇 년에 한번은 천재(天災)가 다가온다. 많은 농민들이 몇 푼 안 되는 무거운 보따리를 지게에 얹고 어린 아이 셋, 넷을 앞세워 마른 눈물로 정든 고향을 떠나는 서글픈 풍경을 만경생은 여러 번 목격했다.
흙의 문화는 착취, 무지, 굶주림, 재난, 질병과 어울리는 ‘엘레지’(애가, 哀歌, elegy)가 아니었던가!
이런 비참한 엘레지는 전 세계 농민들에게 공통된 슬픔이었다.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에도… 역사는 멈출 줄 모른다.
인류에 큰 영향을 미친 혁명은 이른바 산업혁명이다. 18세기 후반부터 약 100년간 유럽에서 증기기관(제임스 와트, 1760년, 영국) 등의 발명으로 생산기술(농사기술도 더불어)의 눈부신 발전과 함께 생산량이 증대됐다. 새로운 ‘변화’(사회적 측면)가 전 유럽 및 미 대륙으로 파급됐으며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그리고 자유주의 시민들은 노동자들과의 갈등(사회적 문제로 위생문제, 교육, 주택, 급격한 도시 인구 증가 등)이 점차 심해졌고 농촌에서는 탈농·이농이 급증하게 됐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아시아·아프리카 등으로 영향력을 넓혀 갔다. 이 과정에서 군사력을 바탕으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는 제국주의가 팽배해졌다. 제국주의는 타민족을 제압하고자 했고, 피식민지 농민들의 교육, 위생 등 생활 수준 향상에 뒷전이었으며, 그들의 자주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 식민지들은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종식 후 독립(한국을 포함 오늘까지 약 120개국)을 맞이했으나 대부분 후진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와중에 유럽에서는 시민과 농민들에게 배움의 기회 향상과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농업학교 설치와 교육의 제도화, 혁신 등을 위해 일생을 교육, 즉 농민들 ‘교육사’에 몸 바친 페스탈로치(174 6~1827년, 스위스 교육개혁가)가 나타난다.
1785년 미국 농촌에는 인력 부족으로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대량 수입되어 농사에 투입된다. 자유도 박탈당한 이들 흑인들에게 가해진 인권유린은 우리 인간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 일면 매사추세츠(Massachusetts)주 농사진흥회(민간단체)는 처음으로 인쇄물을 활용하는 농업강습회(1792년)를 개최했고, 1839년에는 강습내용에 조금 더 실천적 과제를 선택해 과학적 이론도 접목할 수 있는 강연이 대중 상대로 시작됐다. 1845년 오하이오(Ohio)주에선 성인 농업 클럽(Farm Club) 조직이 발족돼 정기 월례회도 개최한 바 있다. 이런 실습행사가 후일 4-H의 실천사회교육클럽으로, 성인들 대상의 농사교도사업 발생의 근원(根源)이 된 것이다.
유럽과 미국의 농업기술은 아시아·아프리카·남미 등의 지역보다 많이 앞서 나갔다. 유럽 전체 인구는 당시 약 1억9000만명(1790년) 정도로 생산력은 여러 방면에서 커져 갔다. 영국의 도시 인구는 1800년 초 전체 영국 인구의 약 50%를 차지했다. 20세기 초에는 유럽과 미국의 도시인구가 농촌인구보다 많아졌다고 기록된다. 무질서한 도시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된 노동력은 각종 공장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근무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런 악환경 속에서 특히 시골 출신 청소년들의 노동환경은 더욱 좋지 않았다. 어린이(13~16세)들의 노동시간은 하루에 15시간이 보통이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은 어린이보호법(1802년과 1819년)을 제정했고, 1824년에는 ‘어린이·부녀자’의 광산 노동을 금지시켰다.
제정 러시아의 무산계급인 노동자, 농민, 시민 주도의 1917년 ‘2월 혁명’은 이후 1930년 ‘피의 대숙청’(소련 공산당 반대파에 대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혁명을 싹트게 한 실질적인 동기는 1860년 후반 러시아 청년들이 부르짖었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를 뜻하는 러시아 말, Bu narod)운동’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로 인해 1861년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농노해방령(農奴解放令)을 내렸으며, 동시기에 미국의 남북전쟁이 발생했다는 것은 시대적 발전 과정의 일치가 아닐까 생각된다. 즉 농민들의 자주권과 평등권 획득을 위한 투쟁의 역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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