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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5 격주간 제84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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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탐방] 4-H는 튼튼한 인생의 집을 짓는 주춧돌 |
전 병 설 감사 (강원도4-H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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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설 강원도4-H본부 감사는 청소년시절에 만난 4-H이념을 신조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
“4-H는 ‘좋은 것을 더욱 좋게’ ‘실천으로 배우는’ 학교였고, 지·덕·노·체 4-H이념은 내 삶의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전병설 강원도4-H본부 감사(61·평창군 봉평면 원길리)는 청소년시절에 만난 4-H이념을 신조로 지금까지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4-H자체가 자신의 인생이었다고 한다. 4-H에서 삶의 지혜를 배웠고, 소양을 쌓았으며, 폭넓은 인간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4-H이념은 내 삶의 자양분”
전병설 감사가 4-H를 만난 것은 1970년대 마을단위4-H회에 가입하면서부터였다.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장남마을4-H회였다. 그는 많은 회원 가운데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1975년에 두촌면4-H연합회장, 1976년에 홍천군4-H연합회장, 1977년에 강원도4-H연합회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또 ‘한국4-H중앙연합회 결성 추진위원’으로 활동하며 중앙연합회 창립을 위한 산파역을 담당하기도 했다.
전 감사는 1980년대에는 도시로 나가 직장생활을 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며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생활했다. 하지만 “빛나는 흙의 문화 우리 손으로!”를 외치며, ‘순결스런 4-H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던 그로서는 도시에서의 안정된 생활에 만족할 수 없었다. 농촌에서도 얼마든지 꿈을 펼칠 수 있고 도시보다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이곳 평창에 터를 잡고 내려오게 되었다.
그가 선택한 업종은 사슴이었다. 당시만 해도 사슴 사육은 낯선 일이었다. 쉽게 시작할 수 있는 직종이 아니었다. 지·덕·노·체 4-H이념이 몸에 밴 그로서는 농촌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일에 대한 설렘이 있었다. 사슴농장을 운영하면서 점차 사슴사육농가도 늘어났다.
하지만 농가에서는 사슴뿔을 자르는 전각작업을 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전문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지만, 주말에 일이 몰리면서 큰 비용을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양록인교육에 앞장섰다. 전각기술 보급으로 농가의 소득 증대를 위해 노력했다. 또 다른 문제는 판로가 다양하지 못한 것이었다. 판로를 확보하는 것이 양록사업 성패의 관건이었다. 전 감사는 생산자로부터 녹용을 매입해 대량으로 유통시키는 시스템을 통해 양록사업의 활성화를 이룰 수 있었다.
4-H정신으로 농업·농촌 발전에 힘써
이러한 전 감사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 농가들의 지지에 힘입어 한국양록축협 이사, 한국양토양록농협조합장 등을 맡아 활약했다. 우수사슴품평회 심사위원, 녹용연구소 연구위원 등으로 양록업의 발전에 힘썼다. 또 봉평에 와서 메밀협동조합을 창립했으며, 현재는 농업회사법인 평창우리네농산(주) 대표이사를 맡아 지역농업 발전과 농업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 감사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4-H에서 배웠다고 강조한다. 회의진행법과 단체 활동을 통해 얻은 대인관계는 직장생활, 농협조합장, 각종 단체 책임자로 일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단다.
“4-H는 내 삶의 든든한 주춧돌이 되었다.”는 그는 후배 4-H회원들을 4-H이념과 교육철학으로 육성하는 일에도 열심을 내고 있다. 지금까지 클로버동지회, 4-H연맹, 4-H후원회 등에서 계속 4-H와의 인연을 이어왔으며, 현재는 강원도4-H본부에서 후배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늘 4-H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지금까지 4-H와 농업과 농촌 그리고 농업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미력하나마 힘써왔습니다. 앞으로도 이 빚진 마음을 갚으려는 자세로 살아가겠습니다.”
4-H를 머릿돌 삼아 인생의 집을 튼튼하게 지어온 사람, 전병설. 그의 얼굴에서 진실된 4-H인의 경건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조두현 사무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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