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교도사업 설정 위한 최종 한미협정과 4-H 전국 확산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4-H와 농사교도사업 (7-5)
폐쇄적, 배타적, 봉건주의 사회를 타파하고 농민들로 하여금 한 단계 높은 새로운 삶을 자의적으로 창조하는 동기부여를 파급하려는 노력은 1947년부터 정·관·학계에서 끊임없이 논의되고 추진된 바(1952년 10월 농사보급회 조직과 1953년 12월 농업교도사업 실시에 관한 5부 장관 통첩, 즉 각급 단위 농사교도위원회 조직, 1956년 6월 대통령령 제1136호 등) 있었으나 우리의 체질과 능력은 이를 적절히 수용할 여력이 없었다. 동시에 그동안 실시된 사업(주로 각급단위 지도원 훈련을 제외하고)은 농가문턱과 부락에 전면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1953년 환도와 함께 OEC(경제조정관실, UNCAC의 후신)의 밀어붙이기식(어떤 면에서) 추진방법은 당시 피원조국으로서 승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도사업의 종합적 타당성과 구체적 내용(국회 농림분과위원회 제출)에 대한 토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만경생도 더욱 분주해졌다. 일면 농촌지도자(지도요원)들과 독농가들의 욕구도 점차 높아졌다. 현지 지도자들의 목소리는 점차 강력해졌다. 이는 당시 농림부 재정보조를 받은 농사교도위원회 발간 농사교도의 끊임없는 논설과 6.25한국전쟁 전후 6년간 강습 받은 지도요원 약 3000명의 요구였다.
6.25한국전쟁 전후 우리나라는 가장 시급한 것이 ‘전후 복구와 재건사업’이었다. 기성가치관 불식을 통한 새로운 사회 창조는 국민 모두에게 부과된 무거운 짐이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4-H운동에 대한 기대는 더욱 더 명백해졌다.
현대화된 새로운 농사교도사업 설정 계획에 대한 미국원조당국(새로운 관점에서)의 기술적·재정적 지원(그들의 일관된 정책)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처럼(우리 정부와 국회의원들의 관점) 보였다.
1956년 미국은 한국에 잉여농산물원조법(공법 480호)을 제정하여 한국에 무상원조(1945~81년 총 229억9469만3000달러를 제공, 1956년부터 4억8000만달러 추가 제공 분 포함)를 제공했다. 이중에는 농사교도사업(4-H포함) 설정과 초기 활동경비(농사원 건축비, 교도원 교육훈련비, 시청각기재, 교도사업장비-전시용, 시군지도소 건설 보조, 이동용 차량 등)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의 식량부족은 연간 약 109만석(도입량 189만석(1959년), 1960년 부족 211만석, 도입 351만석)으로 크게 증가되었는데 미국 해외 원조계획인 480 원조양곡도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주: 잉여농산물 초과도입으로 농민들 곡가에 막대한 지장을 준다는 여론과 원조를 많이 도입 재건사업 촉진 확대를 유도한다는 여론 대립).
바야흐로 정상적 농사교도사업 설정에 대한 모든 분위기는 희망적이었다. 그 증거로서 한국4-H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앤더슨(1954년 봄 내한, 동년 한국4-H중앙위원회-현4-H본부 설립에 적극 협조)은 한미재단(1954년 1월 미국 민간지원 법인체, 한국사무소 설치) 4-H고문으로 내한했고, 한국정부와 OEC(미국 경제조종관실) 간에 ‘농사교도사업 발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1954년 8월 농림부장관 최규각(崔圭珏) 장관실에서 거행. 만경생도 참석함).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한국 정부는 농사교도사업 기구를 법제화 하고 2)이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명료한 행정계통을 수립하고 3)소요예산은 국회의 예산조치에 의하여 충당한다. 4)농사교도기관에는 농민을 위하여 비정치적, 헌신적 그리고 공평한 입장에서 대변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지식과 훈련을 받은 인재를 배치한다.
한편 미국 ICA(미국해외원조처)는 이 사업에 필요한 물자, 용품, 기구를 구입하기 위해 124만달러를 제공하고 고위교도직에 종사할 인사(중앙실무자) 3명을 미국에 파견하여 훈련시키는 경비(1만3000달러)를 상기 지원금에서 지불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미국에서 13명의 농사교도 기술전문가(각 도 고문, 중앙의 교도, 4-H, 생계, 농홍보, 토양과 비료 전문가 등)를 초빙하여 사업계획, 운영, 훈련 등과 관련된 기술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56년 이른 봄 우리 농사교도사업 설정 추진에 따뜻한 봄바람이 함께 불어왔다. 사업설정에 최종적 결단을 내릴 ‘Macy 박사(미네소타주립대 학장 겸 주농사교도사업 총책) 일행’이 내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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