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9-15 격주간 제837호>
[이달의 착한나들이] 텅 빈 방이 웃는, 필리핀 막탄섬에 가다

닭장 옆에서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필리핀 세부의 막탄섬은 휴양지다. 휴양을 한다는 건 모든 걸 비우고 쉰다는 뜻. 아무 생각 없이 다녀오려고 자유 여행을 선택했으나 뭔가 더 알고가야 한다는 욕심 때문에 끝내 인터넷을 뒤졌다. 필리핀은 400년 가까이 스페인, 미국, 일본의 식민지였으며 소매치기가 많고 자존심이 뻔뻔스러울 정도로 강하며 돈이 생기면 다 떨어질 때까지 놀다가 배가 고파야 일을 하는… 아무 생각 없는 민족인데 행복지수는 높다고? 미래 걱정 없이 산다는 것, 대체 그게 가능한 일인가?
사실 필리핀 막탄은 푸른 바다와 하늘이 환상적인 만큼 거리의 분위기는 공포스럽다. 총기 소지가 가능하며 마약과의 전쟁이 벌어지는 나라. 호텔 정문엔 커다란 개가 모든 차량을 통제하고 마약을 찾아 킁킁 거린다. 밤엔 사방이 캄캄하다. 전기료가 비싸서 냉장고를 주어도 쓸 수가 없다. 그러나 여행은 현지 사람을 만나는 일, 나는 용기를 내어 아침 일찍 비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봤다.
그 길에 이어진 풍경은 우리나라 60년대 사진 속 같았다. 길가엔 쓰레기가 쌓여 있고 방 하나에 한 가족씩 사는 집들이 붙어 있었다. 길엔 개들이 어슬렁거렸는데 신기하게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 어리석게 짖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듯 어떤 개는 바닥에 엎드려 명상에 잠겨 있었다. 닭장 옆엔 아이 둘이 쪼그리고 앉아 흙으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어릴 때 내 모습 같았다. 왠지 뭉클한 느낌에 사진을 찍는데 저만치 에서 한 남자가 손짓을 했다. 그는 쌓아놓은 나무 위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매일 여기서 모닝커피를 마신다는 그의 표정은 하늘처럼 맑았다. 이야기 소리가 들리자 집집마다 아이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필리핀 사람들은 아이들을 12명까지도 낳는다. 그것은 천주교 신자의 축복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마당에 놓여 있는 과일 바구니를 보았다. 그 과일은 우리나라에서 1개에 1500원 정도 하는 아보카도였다. 살 수 있냐고 묻자 그는 나를 데리고 주인 여자에게 갔다. 그녀는 저울에 달아 1달러에 4개를 주었다. 그리고는 맘이 안 놓이는지 설탕 봉지를 가지고 와 보여주었다. 아마도 뿌려먹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때 아이들이 농구공을 가지고 와 벽에 붙은 골대에 넣기 시작했다. 마치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필리핀 아이들은 모두 밖에서 논다. 집집마다 골대가 있고 공터마다 농구하는 아이들로 넘친다. 떠들썩한 아이들 소리가 이 살벌하고 가난한 나라를 무장해제 시킨다. 이 나라 사람들은 잘 웃는다. 화장실 청소를 하며 춤을 추고 관광객이 탄 배를 물속에서 끌고 가면서도 엄지를 치켜든다.
이 나라 아이들은 공부에 대한 억압이 없다. 고등학교까지 의무교육이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가 훨씬 많다. 배는 고파도 놀며 산다. 나는 갑자기 긴장이 풀려 말했다. “이곳은 참 평화로워 보이네요.” 남자의 대답은 단순했다. ‘It’s true!’ 그의 웃음소리는 햇빛처럼 곧게 내려와 누추한 골목을 환하게 만들었다.
옷장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 옷을 빨랫줄에 널어놓고 사는 사람들. 모두 풀처럼 밖에 앉아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 방을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 웃었다. 복잡한 나를 보고.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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