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농사교도원들의 설움, 4-H로 달래다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4-H와 농사교도사업 (7-4)
1952년 UNCACK는 거제도 반공포로를 대상으로 교양학습 인쇄물(주로 농사관련 교재와 위생보건) 작성팀을 가동한 바 있다. 책임자는 Dexter Luzt 박사였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평양숭실전문학교 농업선교사였으며, 후에 월간 농민생활 발행인을 지냈다. 인쇄물 작성팀은 1.4후퇴 시 월남한 주종철 등 4인의 농대출신이었는데 당시 농업관계 장서 약 1000여권을 구비해 만경생에게도 좋은 참고가 됐다.
그 팀은 각종 영농 리플릿, 팜플릿, 포스터를 발행, 전국 농촌에 배포하여 교도사업의 선도적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래 4-H회원들의 관심을 끄는데도 효과 만점이었다. 특히 대형 천연색 4-H소개 포스터(일본에서 인쇄)는 인기가 좋았다. 이런 집중적인 대농민 4-H홍보는 마을에서 무보수로 장기간 갈팡질팡하던 현지 지도원들에게는 마치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봄 농사에 대비한 퇴비 마련, 비료 사용법, 토양에 대한 상세한 설명 등 인기 만점이었다. 마당에서 마른 흙먼지와 놀던 아이들에게 배포된 각종 과제 안내 책자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이후 4-H 전국 확대 사업에 큰 효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현지 지도원들의 노고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 지도기술과 기구조직은 아직도 전도요원(前途遙遠)했다.
여기서 4-H운동과 농사교도사업의 종주국 미국의 발달과정을 참고로 살펴보자. 미국 농민들의 새로운 변화를 향한 도전은 남북전쟁(1861~18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흑인노예해방(1865년, The Emancipation Proclamation)에서 시작된다. 참고로 1860년 전체 미국인구의 14.1%인 440만명이 흑인노예였고 이 중 80%가 농업노동인력이었다(100년 후인 1960년 미국 전체 인구의 9.7%인 1190만명이 흑인). 5년간의 내전으로 많은 농장과 농업 인력이 유실되었고, 뒤이어 흑인 남성의 투표권을 인정(1870년)하면서 농촌 노동력은 더욱 감소했다. 이런 와중에 여러 주에서 연방정부 소유토지양도법(1887년 Hatch Act와 Morvill Act)이 국회를 통과함으로써 여러 주립농대(State Ag. College = Land-grant Univ.)가 설립되어 농업기술연구와 농사교도 그리고 고급 농업 엘리트 양성이 시작된다.
농업노동력 부족과 영농기술 미숙, 그리고 각종 농작물의 병충해는 필연적으로 농업의 어려움을 가중시켜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대두된 것이 보편적 농민교육이었다. 아울러 거대한 농장경작을 위한 강력한 축력(畜力) 에너지를 넘어 점차 동력 에너지, 즉 기계화 농업으로 변혁된다. 미국의 농사교도사업에 대한 동기부여(Motivation)는 1890년대부터 여러 교육가와 정치인들의 선견지명에 의한 숨은 노력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같은 시기에 농촌 청소년들이 자발적 농사학습클럽을 조직하여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본 A. L. Lever와 Smith는 클럽활동에 크게 감동하여 1914년 Smith-Lever Act(Smith, Lever는 각각 연방 상하원 농업분과위원장)를 입법하여 농사교도사업은 점차 협동사업(Cooperative Ag. Extension Service-연방정부, 주정부와 주립농대 주관하는 협동체 기능)체제로 발전해 나간다.
특히 미북부지역 농사교도사업의 선구자 J. C. 맥라후린 위원은 다년간 4-H와 성인 농민들의 클럽활동에 영향을 받아 1909년 농사교도사업과 농업 관련 직업학교에 지속적인 지원을 한 바 있다.
미국정부는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저개발 신생독립국(1945년 후 120여개국이 독립됨) 경제원조계획의 일환으로 4-H운동을 포함한 농사교도사업 설정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동남아 16개국(일본 포함) 중에서 유일하게 한국은 4-H운동과 농촌지도사업발전 선진국 모델로 부각되어 여타 지역국들의 성망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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