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4-H 농사교도사업 견인차 역할을 하다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4-H와 농사교도사업 (7-3)
해방 후부터 6.25한국전쟁 전까지 미국의 대한 원조는 미미했다. 미국은 주한미국대사관 직속으로 AMIK(American Mission in Korea-주한원조사절단)을 가동시켰다. AMIK는 1948년부터 51년까지 주로 교육, 농업, 전기, 도로항만, 철도 개량 사업 등을 펼쳤다. 만경생은 동사절단 행정보좌관으로 근무 중 6.25한국전쟁과 함께 1951년 봄부터 UNCACK, KCAC(사령관 TD. Hyden 미군 준장), OEC, USOM 등 명칭은 다르나 계통적 미국의 한국경제원조기관, 식량농림국 농사교도사업과 4-H 업무 전담으로 근무하면서 1954년 C.A.앤더슨(한미재단 4-H고문) 내한과 함께 한미재단 4-H지원사업을 겸직(4-H사업 National Technical Specialist)하게 됐다.
1951년 한수 이남이 완전 수복됨에 따라 만경생은 경기도4-H전문가(김갑영-후에 교도보편집, 이병춘-후에 경기도농사원장)들과 함께 화성군을 중심으로 전쟁 피해를 입은 옛 4-H마을들을 순회하면서 실망에 빠진 회원들의 실태파악과 사기 진작에 노력했다. 또한 빈 손에 노출된 부원들에게 우선 과제활동을 유도하기 위해 안양 경기도종축장(노용환 장장)에서 병아리 1000마리를 구입(UNCACK 지원)하여 1개 구락부에 20~30마리씩 분양했지만 사료 부족과 예방접종 불량으로 인해 몇 주후 50% 정도 폐사하여 회원들과 함께 크게 실망한 바 있다.
이 당시 국회(부산소재)는 농사교도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했다. 심히 유감스러운 처사였지만 당시에는 국방비가 제1순위였다. 이런 와중에 UNKRA(UN Korea Rehabilitation Agency-UN한국부흥단)는 1952년 FAO(세계식량기구)를 초청해 ‘한국의 농·수·임업 복구 발전책’이라는 보고서를 접수, 한국의 농사교도사업 육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로써 1953년 정부 환도와 함께 농사교도사업은 재논의되기 시작했다.
한편 1953년 UNKRA는 농업지도사업을 위한 전문가 양성예산으로 25만달러를 책정, 11명의 관련 인력(채관식, 김갑영, 이재영, 이병춘 등은 후에 교도사업 전문가로 종사했으나 몇몇 파견생은 귀국 후 교도사업과 관계가 없는 정부 고위직에 취임)을 미국에 파송해 현지교육(6~10개월)을 받도록 했다. 동시에 시청각기기와 차량 등을 도입해 지도사업의 기초 구축에 노력했다. 이에 앞서 1952년 10월에 농림·내무·국방부 합동으로 농업지도요원제도(병역면제)를 제정, 읍면에 지부를 두어 원조자금을 유도하기 위해 위장기능을 설치한 적도 있다. 다른 기쁜 소식은 농림부가 책정한 농촌건설요강이다. 요강에는 4-H운동을 적극 지원한다는 조항이 명기되어 4-H운동은 점차 국가사업으로 발전해 갔다. 당시 4-H업무는 농림부 농경과가 관장하다가 1955년 3월 이후 농업교도과(초대과장 이기홍, 후에 국민대 교수)에서 주관하게 된다. 당시 금융조합(후에 농업은행, 농업협동조합중앙회로 일대 개편)과 수리조합에서도 농사교도사업을 의욕적으로 시도했으나 UNCACK의 강력한 반대로 실현치 못했다. 한편 정부는 1956년 3월 중앙농업기술원에 교도부를 부활시키고, 시군농업교도계(업무연락 정도)를 둔 이상한(중앙에 이원적 제도) 통합 형태로 조직체계를 갖춘 적도 있다. 만경생이 소속된 UNCACK는 1951년 봄, 농촌 복구와 봄농사 지원 구호활동을 전개하려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1951~1952년의 연이은 대흉작은 국민들의 기초식량부족에 혼란을 야기했다. 당시 총인구 약 2055만명, 농가인구 전인구의 63%로 약 1286만명(농가 호당 인구 약 5.8인) 그리고 쌀 연평균 수확은 1450만석이었으나 1951년도에는 급감해 1135만석이어서, 미국 정부는 부족 식량과 전쟁구호 목적으로 잉여 양곡 수입을 허가했다(수입량은 1951년 148만석, 1952년 1313만석, 1953년 710만석). 이에 대비하여 정부는 농업증산 5개년 계획(1953~1957년)을 수립, 미곡생산을 30% 증산시키고자 했다. 실행 방법은 농촌청소년 대상 교육적 실천학습을 표방하는 4-H클럽운동이 유일한 지름길로 대두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