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H운동, 변화 향한 도전·역경 속에서 맴도는 농사교도사업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4-H와 농사교도사업(7-1)
인류 생명의 기원과 먹거리는 불가분의 관계다. 두 존재는 엄연한 역사를 창조했다. 인류 근대사는 우리 인간의 존재 가치를 점차 변화와 위협 속으로 몰아갔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을 시작으로 신흥 열강들의 야욕은 끝이 없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맞설 새로운 지혜와 용기는 불가피했다. 2차 세계대전은 핵폭탄이란 대량살상무기의 사용으로 끝났다. 하지만 인구 팽창은 또 다른 핵폭탄으로 예견되며 지구에 새로운 이슈를 던진다(2007년 UN인구백서, 1800년대 1억명, 1960년 30억명, 2007년 66억명, 2013년 73억명, 2030년 예측 80억명 이상). 4-H의 존재가치가 여기에 있다! 전 세계는 매년 200만 명의 선진 청년농업인, 즉 4-H출신자들을 필요로 한다.
과거 서구 열강들은 약육강식의 논리로 세계 각지를 누비며 식민지 점령에 열을 올렸다. 원주민(농민)들을 착취했고 농민들은 장기간 무지와 빈곤에 얽매였다. 과거 봉건시대의 농사지도는 ‘흥농(興農)이란’ 아름다운 두 글자로 권하되 그 이념은 어디까지나 농민 통제 이론에 입각하여 봉건적 사회경제질서의 안정 유지에 치중해왔다. 일제강점기는 그 산 증거였다.
1945년 해방은 우리에게 기쁨과 실망을 함께 안겨줬다. 자유 독립과 민주주의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국토양단이란 변수와 후진적 산업의 위축, 식량 유통의 혼란은 우리 생활을 극도로 어지럽게 했다. 농민 수탈의 소작제도(당시 남한 총 인구 약 2010만 명, 87% 농촌 인구 중 77% 농업인구, 소작농민 63.5%) 아래서 생계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상태였다.
농민을 수탈하던 소작제도의 개혁(토지소유자 7, 소작농 3이 해방 후 5:5로 잠시 변경), 협동조합 육성, 계몽 교육 등을 실천하기 위한 농촌지도사업 설정은 시급한 과제였다. 해방 후 주둔한 미군정은 한국의 피폐한 농촌 발전을 위해 미국에서 1914년 이후 효과적으로 실시된 농사교도사업 도입을 대외원조사업의 제1순위 목표로 삼았다. 미군정이 제안한 농지개혁(1946년 10월)을 실시(1949년 공포 실시)해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을 현실화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경기도내 농촌청소년들이 마을에서 활동했던 흥농회(興農會, 10~30세)는 ‘경기도 농촌청년구락부’로 대체되면서 4-H의 자주·민주적 실천농사과제 실습활동으로 전환된다. 당국과 민간 차원의 재원 지원으로 활동이 도 전체에 전파되어, ‘농청(農靑)’이란 월간기관지도 발행하면서 4-H회원들의 사기를 높였다. 1947년 가을 경복궁에서 개최된 경기도4-H품평회(새끼줄 꼬기, 가마니 짜기 경연)는 한국4-H 최초의 경진대회였다. 당시 내용은 빈약했으나 대외적 효과는 훌륭했다.
경기도4-H지도체계는 민간지원단체인 경기도 농촌청년구락부연합회 후원과 도청 농무과에 설치한 4-H지도부 신충현 부장 아래에 김갑영-조직·지도, 이병춘-교육·행사, 이무선-여생활지도원, 여분원 생활개선 담당을 두고, 이진묵(앤더슨 보좌관 겸 연합회 상무이사)의 지도하에 전 도내 시·군 유급 4-H지도요원을 채용해 6·25 한국전쟁까지 4-H육성에 전력을 다했다.
1949년 1월 이진묵(李辰默, 경기도4-H후원회 상무)이 미국 시카고에서 개최된 미국4-H대회(National 4-H Congress)에 최초로 참석, 한국4-H활동을 해외에 소개한 바 있다. 동 대회에 두 번째로 참가한 관계자는 1955년 윤용선(전 농림부 장관) 당시 한국4-H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 이사였다. 그는 한미재단 후원으로 6년 만에 참가한 바 있다.
경기도내 5만여 4-H클럽 부원들은 6·25 한국전쟁 중 두 번의 피난을 겪는 동안 그들의 정든 초가삼간과 마을 친구들은 사분오열되어 동네는 완전 황폐화됐다. 그뿐만 아니라 얼마 되지 않는 농구, 가축도 완전히 잃게 됐다. 그러나 농촌청소년들 아니, 4-H회원들은 넋을 달랬다. 4-H운동을 통해 더 좋은 미래를 창조할 것을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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