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7-15 격주간 제833호>
[지도자 탐방] 더불어 사는 세상 꿈꾸며 달려온 4-H 한평생

김 준 기 전 회장 (한국4-H본부)

한국4-H운동의 산증인인 김준기 전 한국4-H본부 회장은 홍익인간, 농심함양의 한국4-H운동 이념을 세계화 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준기 전 한국4-H본부 회장(79)이 퇴임한지도 4년이 훌쩍 지났다. 요즘 심심찮게 김 전 회장의 근황을 묻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의 굴곡 많았던 인생사를 작은 지면에나마 정리해 볼 욕심으로 성남시 태평역 인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공동체사회연구소.’ 지난 2012년 한국4-H본부 회장을 퇴임하면서 설립해 운영해 오고 있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몸은 늙어 가는데 마음이 늙지 않아서 탈이다.”는 답이 돌아왔다.
결성된 지 26년을 맞는 ‘4월혁명회’에 매주 목요일마다 참석하고 있다고 한다. 매주 월요일에는 ‘역사학습모임’을 통해 시민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갖게 하고, ‘민주행동원탁회의’에도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유전자조작 농산물(GMO)에도 관심을 갖고,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지역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화진리에서 태어났다. 해당화가 너무나 아름답게 피어 눈물겨운 아주 가난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고픔을 면하려고 부산으로 갔다. 담배며 신문팔이, 극장 방석팔이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마을로 돌아와 어렵게 초·중·고교를 다녔다. 청소년 김준기는 심훈의 ‘상록수’, 이광수의 ‘흙’ 등의 소설을 읽고 농촌계몽운동에 빠지기 시작했다. 동네에는 초등학교에도 못 들어간 아이들이 수두룩했다.
어느 날 학교실습농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교장선생님이 부르셨다. 대뜸 하는 말씀이 “대학을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갈 수 없다.”고 대답했다. 교장선생님은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 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대학을 간다면 수원농대(서울대 농과대학)에 가겠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어이없어 하면서 “자신 있느냐?”고 묻고는 합격만 하면 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지급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본격적인 입학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서울대 문제집을 구해 보았다. 시골 농고에서 전혀 배우지 않는 것들이었다. 이 무렵 운명처럼 4-H가 찾아왔다. 이웃 마을이 경상북도 4-H시범마을이었다. 가보니 외국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외지인들이 와 있었다. 팸플릿과 책자를 집에 가지고 와서 꼼꼼히 읽었다. ‘4-H과제이수 방법’이 나와 있었다. 바로 자기주도학습이었다.
4-H과제이수 방법대로 1주일-1개월-1년 단위로 계획을 세웠다. 계획적으로 공부를 하자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겼다. 방학이 끝나자 각 교과목별로 선생님이 출제한 시험을 치렀다. 의외로 괜찮게 성적이 나오자 “알아서 공부하라.”고만 했다.
이렇게 공부해서 기적처럼 서울대 농과대학에 합격했다. 1년을 다녔으나 계속 공부할 형편이 못됐다. 장학금을 약속했던 모교도 재단이 바뀌고 결국 폐교되었다. 휴학하고 고향에 돌아와 한 학기 동안 다시 계몽활동을 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제대하자 할아버지가 키우던 소를 팔아 주며 “이것밖에 없으니 네가 알아서 공부를 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등록을 미루다 유달영 학과장을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유 학장은 “고향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라.”고 했다. 오기가 생겼다. “기어이 공부를 하고야말겠다.”면서 장학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유 학장은 성적표를 살펴보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복학을 해서는 ‘서울대학교4-H연구회’에서 4-H활동에 전념했다. 오색리 이장 집에 방을 얻고 시골에 있는 동생도 불러올려 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고등동, 탑동 등에서 야학 등 계몽운동에도 힘썼다.
1962년에 열린 4-H중앙경진대회에 대학4-H도 참여시켜달라고 요청했으나 예산 사정으로 좌절되었다. 농촌진흥청을 비롯해 4-H관계기관과 인사들을 모두 찾아다녔다. 다행히 한미재단에서 강건주 선생 등의 도움으로 대학4-H도 중앙경진대회 참석하는 길이 열렸다. 이 대회에서 전국대학4-H연구회연합회가 결성되어 초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김준기 회장은 ‘김치찌개, 된장찌개 냄새나는 한국적 4-H’를 부르짖었다.
원래 산지농업에 뜻을 두었던 그는 졸업 후 도시근교농업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서울시농업기술센터에 임시직으로 근무도 했고, 한국4-H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에서 총무부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다.
농촌지도직 공무원 시험을 치러 서울시농업기술센터에 정식 발령받고 서울근교의 농업발전을 위해 땀을 흘렸다. 서울 지역의 4-H회 육성에도 힘썼다. 일신여상과 인덕실고 등 학교4-H회도 조직했다. ‘학교4-H회’가 이때 처음 탄생했다.
하지만 일개 공무원의 신분에 운동가적 기질이 넘치는 김준기를 담아둘 수만은 없었다. 직접 근교농업에 뛰어들어 상계동에 청정채소단지를 조성했다. 대나무로 82㎡의 비닐하우스를 지은 것도 최초였다고 한다. 이 농장은 대학4-H를 비롯해 대구농고, 진주농고 등 많은 농고생들의 학습장이 되었다. 어느 날 신구대학 이종익 이사장이 김준기 농민운동가에게 제안을 했다. “이제 농사는 그만 짓고 사람농사를 함께 짓자.”는 것이었다. 사람농사라면 바로 4-H의 농심철학이 아닌가. 대학 강단에 서면서 아울러 ‘성남지역사회발전연구소’를 설립해 지역운동을 펼쳤다.
당시 성남시는 대부분 이농한 저소득층이 사는 곳이었다. 이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시민운동을 전개했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사회,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군사정권이 가만히 둘 리 없었다. 공안정국의 타깃이 되었다. 마침 서경원, 임수경이 밀입북하자 배후세력으로 지목됐다. 1989년 6월부터 1년 9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복권이 되자 정치의 유혹이 있었다. 뜻하지 않게 국회의원에도 출마했고 진보진영의 후보로 도지사에도 출마했다.
그러면서 어느새 고희를 훌쩍 넘었다. 이 사회를 변혁시키고자 불처럼 타올랐던 가슴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결국 4-H였다. 순결스런 4-H… 빛나는 흙의 문화 우리 손으로… 어느 시인이 ‘내 인생의 8할은 바람’이라고 했던가. 김준기라는 인간에게 4-H가 차지하는 비중은 8할이 넘었다. 2006년 3월 한국4-H본부 회장에 취임해 ‘사람농사’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글로벌4-H네트워크의 기초를 닦았고 아시아4-H네트워크와 글로벌4-H네트워크 세계대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6년간 회장으로 재임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성남시의 손바닥만 한 연구소에 앉아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마지막 열정을 태우고 있다. 그는 “70여년 전 미국에서 건너온 4-H이지만 이제는 홍익인간, 농심함양의 한국4-H운동 이념을 세계화 시켜야 한다.” 강조했다. 회장 재직시절 4-H이념의 체계를 확고히 잡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후배들이 그 몫을 담당해 줄 것을 당부했다.  〈조두현 사무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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