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녀들과 4-H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남녀 성차별에 대한 심각성을 기술한 130여년 전 우리의 모습을 더듬어 보자. 한 외국인 외교관인 퍼시빌 로웰(Percival Lowell)이 쓴 책 내용을 인용하겠다. “이 장의 주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여성의 지위부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에서 여성의 지위는 부정이나 부인의 차원이 아니라 아예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 조선에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질적, 육체적으로는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정신적, 도덕적,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여성은 거의 무(無)에 가깝다.”라고 기술한 바 있다.
미국인인 로웰은 1883년 조선의 미국 파견 수교사절단 안내 역할을 수행했던 외교관이자 천문학자였다. 저서로 ‘내 기억속의 조선, 조선 사람들’을 남겼다.
1893년 여성평등권의 태동은 뉴질랜드에서 시작됐다(여성의 사회정치 참여와 1920년 미국 여성투표권 행사). 이후 여성들의 남녀동등권 운동은 거세게 불어 닥쳤다. 그러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남존여비(男尊女卑) 풍습은 여전했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우리나라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우리에겐 배고픔(Freedom from Hunger)이라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최우선 과제였다. 그러나 남녀동등권 실현 문제도 매우 간절했다. 4-H운동을 통하여!
1950년대 초 한국4-H는 다원적 기능발휘를 목적으로 전국 농촌마을에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면서 마을 소녀들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닥쳐왔다. 바로 동네 남자 아이들과 4-H구락부에 모이는 것이었다. 마을 처녀들이 4-H모임에 참가하면 그 모임은 ‘자부심과 우아함’이 더욱 고조되었다. 마을 남녀아이들이 함께 노래 부르고 공동과제(부락 청소, 미화작업 등)를 하면서 4-H서약을 선서하는데 공동체 감각과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4-H회원이 된다는 것에는 마을(부락-Community) 전체의 협조가 적극 필요했다. 결국 함께 참가하고자 모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사활을 건 혁명적 결단이었던 것이다.
옛 가풍과 전통의 사회규범을 배반하는 일대 배신행위였고, 수백 년간 계승해온 ‘남녀칠세 부동석(男女七歲 不同席)’이란 미풍양속(美風良俗)을 한순간에 파기해야하는 단호한 결심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당시 우리 시골 소녀들은 이런 억눌림과 폐습 이탈에 용감했다.
오직 4-H구락부 참가를 열망하면서 집 안방에서 탈출했다. 소녀들은 ‘집합’에 참가하기 전 두 서너 명씩 좁은 동네 초가집 사이 울타리 담벼락에 숨기도 했다. 울타리 사이로 집회장소 동정을 살펴가며 동네 어른들 눈을 피해 ‘4-H 모임’에 뛰어 든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만경생이 여러 지방 마을을 순방하며 집회장소를 보아 왔으나, 보통 모이는 일에만(지방 농사교도요원의 지시에 의해) 근 두세 시간이 걸리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동네 큰 아이들은 흙때가 묻어 여기저기 누비고 빛바랜 바지저고리와 검은 조끼, 처녀들은 엉클어진 머리에 흰색 저고리와 검정 치마 그리고 치마 밑에서 발목까지 축 늘어진 검은 속바지… 흘러간 우리들의 자화상(自畵像)인 채로… 아니 우리 농촌의 한 폭 풍속화(風俗畵)가 아니었던가.
당시 이들 농촌 청소년 인구는 약 780만명(9~24세, 1951~1955 평균 총인구 2100만명 대비 35%)으로 이중 390만명이 4-H 해당연령 소녀로서 한국의 미래 현모양처(賢母良妻)들이었다.
이후 이들의 4-H 참여는 필연적으로 남녀 동등화가 급진전하는 계기가 되어 민주, 평등, 자유 구현과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큰 획을 그었음은 4-H의 또 다른 하나의 승리라 하겠다. 여성들이 CEO, 정치인, 각종 기계조작, 우주인 심지어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진출하는 오늘의 현실은 당시로서는 감히 경천동지(驚天動地)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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