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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응봉산에 올라 내가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
만약 당신이 꽃피는 4월, 눈부신 봄볕에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면, 그때 도심의 회색빛 건물 사이로 어린 시절 뛰어 놀던 동산이 보였다면, 그 산꼭대기에 족두리 같은 정자가 보이고 산허리를 휘감아 오르는 샛노란 개나리랑 눈이 마주쳤다면, 당신도 부신 눈으로 바라보다 슬그머니 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으리라. 그래서 찾아간 산이 응봉산이다.
산으로 가는 길은 동네로 숨어들어 가파른 골목을 돌고 돌아 나타났다. 응봉산은 응봉역 근처에 있는 81m의 낮은 산이다. 그러나 산허리까지 아파트와 집들이 따개비처럼 붙어있어 산은 마을의 유일한 숨통처럼 보였다.
응봉산을 오르다 보니 개나리가 산이고 산이 개나리였다. 공기마저 노랗게 물이 든 것 같았다. 나는 개나리꽃이 탁탁 타오르는 숲길을 걸어가며 강렬한 위로와 봄의 기운을 느꼈다. 서울에서 제일 먼저 봄이 오고 매년 개나리 축제가 열리는 곳이 응봉산이다.
산 정상에 오르니 멀리서만 바라보던 정자가 나를 반긴다. 나는 정자에 앉아 내가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응봉산 아래로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성수대교, 동호대교가 보이고 강변북로를 수많은 차량들이 쉴 새 없이 달리고 있었다. 눈이 빙빙 돌아 강 건너를 바라보니 강남은 황사로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강가의 아파트들과 빌딩들, 123층의 롯데월드타워의 희미한 실루엣은 허공에 떠있어 현실감이 없어 보였다. 나는 문득 내가 사는 세상이 믿을 수 없는 사람처럼 불안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들려오는 건 끝없는 소음. 자동차, 전철, 응급차 소리와 산 아래 공사장에서 울려오는 굉음이 나를 흔들었다.
나는 언제부터 고요를 잃어버린 걸까? 응봉산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부터 성종대까지 매사냥을 즐긴 곳이라고 한다. 그땐 얼마나 고요했을까? 매 한 마리 푸드득거리며 날아가는 소리가 산을 흔들었으리라. 나는 어렸을 때 캄캄한 마당에 쏟아지던 달빛의 고요를 기억한다. 달빛이 싸리나무를 흔들고 멀리서도 엄마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던 그 밤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온 걸까? 그건 순식간이었다. 라디오가 흑백TV로, 컬러TV로, 컴퓨터로, 휴대폰으로 변해온 시간은! 인간의 욕망엔 브레이크가 없다. 보다 편리한 세상을 향해 달려가는 가속 페달만이 있을 뿐.
얼마 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대국이 있었다. 사람과 기계의 두뇌 싸움. 다섯 판을 두어 이세돌이 한 판을 이겼다.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인공지능은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여 인간의 뇌를 앞지를지도 모른다.
인류의 생존이 시작되면서 지구에 가장 해악을 끼친 인간을 50년쯤 후엔 기계가 제거해 버릴지도 모른다고 한다. 인공지능은 아이가 자라 사춘기에 접어들 듯 스스로 자라며 자의식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과학자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망연했다. 먹지도 자지도 죽지도 않는 인공지능은 인간의 미래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까?
응봉산에 올라 오랜만에 내가 사는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자문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쩌면 꽃피는 응봉산은 이세돌이고 응봉산을 둘러싼 거대한 문명은 인공지능의 알파고가 아닐까?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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