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4-15 격주간 제827호>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⑥

한국4-H와 앤더슨(2)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한국4-H 탄생초기의 일등 공신으로 지목되는 인물이 바로 전회에서 언급한 앤더슨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4-H의 얼’을 첫 제창(提唱-Advocacy)한 천리구(千里駒) 김동선 선생에 대해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앤더슨은 천리구의 4-H를 도입하자는 황금알 같은 제안을 무조건 수락하고 미군정지사로서 이를 행정력으로 강력히 추진하고 지원하는데 성공했다. 이후 1954년 그의 3차 내한을 계기로 한국4-H운동은 전국에 확산되었다. 물론 1957년 농사교도사업(당시 명칭은 농사원, 1962년 농촌진흥청으로 개칭)으로 채택돼 호흡을 함께하면서 4-H는 이 땅에서 급속도로 성장한다. 앤더슨은 어린 시절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한 빈곤한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4-H생활을 해 본적은 없었다. 한국4-H역사에 그가 4-H생활 이수자로 기록된 것은 오기이다.
그는 “대학에서 공부하기 이전까지 가죽구두를 발에 대본 적이 없었다.”며 자신의 고생사를 수차례 피력했었다. 그는 대학에서 치과를 전공했다. 1937년에 육군에 입대하여 중국에 파견된 경력도 있고, 태평양 전쟁 시 미 육군점령지 민사행정부대에 배속, 처음 한국에 상륙한 것이 1945년이었다.
한국4-H가 결정적인 단계에서 그 근본 토대를 구축한 것은 1952년 12월, 농림부가 농촌건설 요강을 제정하고 4-H사업을 정부차원에서 전국적으로 농촌청소년 지도사업으로 채택함과 더불어 앤더슨이 3차 내한을 했다.
1954년 이른 봄, 앤더슨은 퇴역 군인으로서 민간인의 신분으로 당시 OEC(미국경제협조처) 식량농림국에서 농사교도기구 설정업무와 4-H업무를 겸직하고 있던 만경생의 책상머리에 조용히 다가왔다. 헤이머(Dr. Haymmer) 식량농림 국장을 찾는다. 얼마 후 헤이머 국장이 만경생에게 앤더슨을 소개했으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한국4-H를 적극 지원할 ‘귀한 분’ 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홀연히 한국4-H운동에 무엇인가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 줄 것이라는 예감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옆 책상을 점한 앤더슨에게는 2~3일 후부터 많은 한국의 기라성 같은 정·재계 인물들과 장성급 군인들이 방문,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의 과거 업적을 감히 가늠할 수 있었다. 앤더슨이 OEC 식량농림국에 자리잡고 한미재단 4-H고문도 겸직하며 한국 4-H지원사업을 만경생과 함께 시작한 것은 10일 후부터였다. 앤더슨은 만경생이 그의 사업 보좌역으로 동참하기를 요청, 헤이머 국장의 승인을 얻어냈다. 사실 파격적인 승진으로 만경생에게는 업무용으로 자가운전 지프차(한국4-H 전용 제1호 차량)도 제공됐다. 이로써 앤더슨과 만경생은 기나긴 ‘10년 장정’을 향해 첫 발을 내 딛게 되었다.
앤더슨은 만경생에게 한국4-H운동 전국 확대에 관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4년간 한국4-H 전국 확대와 농사교도사업(농사지도사업-Agricultural Extension Service) 설정을 위해 현장을 누볐던 만경생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3일 후 간단명료하게 ‘5개 주요 추진안’을 영문으로 작성해 앤더슨에게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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