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4-H와 앤더슨(1)
연포(燕浦) 강 건 주 (한국4-H본부 고문)
한국 4-H운동의 전국 확산기에 앤더슨(Charles A. Anderson, 1894~1973)과 만경생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나누고 용자(勇者)와 지자(智者)관계로서 근 10년간 오로지 한국 4-H육성을 위해 싸웠다. 지난날을 과분하게 미화할 것도 아니고, 왜곡할 생각도 없다. 그저 흘러간 역사 그대로, 원판 그대로를 4회에 나누어 서술하고자한다.
앤더슨과 만경생의 첫머리는 시종일관 동양과 서양문명의 격렬한 충돌이었다. 완고하고 고집이 센 군인출신 앤더슨을 ‘Koreanize’하기까지는 혼신의 노력이 필요했다. 반대로 막강한 힘, 명예와 부를 앞세운 앤더슨이 빈약한 만경생을 ‘Americanize’하려는 끊임없는 욕망은 항상 충돌로 나타났다.
그러나 우리 두 이질(heterogenity)은 융합했다. 아니 초록(草綠)은 동색(同色)으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4-H 앞날을 위한 ‘멍석’을 깔기 위해! 그리고 앤더슨의 살아있는 전설을 위해!
앤더슨과 만경생의 첫 만남은 6.25전쟁 최고 격전시기인 1951년 이른 여름이었다. 당시 주한미국대사관 육군무관장(대령, 당시 국군 전력증강사업에 분주했음) 근무 시 대구에서 수원으로 온 L-19 경비행기에서 내릴 때였다. 당시 만경생은 UN 민사원조사령부 식량농림국에 근무하며 동 사령부 서울/경기지구 사령관 C. R. 몬스키 대령의 지시를 받고 앤더슨을 초면에 맞이하게 됐다. 앤더슨 대령이 입은 화려한 미국 고급장교 제복에는 각양각색의 훈장과 견장이 어지러울 정도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경기도청(전란 중 임시로 수원시내 화성군청을 사용)으로 직행했다. 이해연(李海燕) 지사, 최응복(崔應福) 산업국장 등을 만나 경기도 한수이남 수복지역 농촌문제와 4-H재건에 화제가 집중되고 있었다. 이들의 재회는 4년만이라고 했다. 특히 앤더슨은 경기도 미군정지사 시절 전개했던 경기도농촌청년구락부(4-H)연합회 복구(주 업무는 후원사업)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비행장에서 앤더슨은 만경생에게 큰 보따리 하나를 마치 선물처럼 전해 주었다. 그 보따리 속에는 많은 미국4-H 서적, 팸플릿, 전단, 각종 과제활동 안내서 등이 들어 있었다. 앤더슨은 은연 중 뭔가를 암시(?)하는 것같이 “잘 읽어 보게!” 하며, 명령조로 말을 끝내고 정찰용 비행기(L-19)를 탔다.
앤더슨의 내한은 세 차례로 나뉜다. 첫째는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부터 1948년 7월까지 미군정행정관으로 부임하여 경기도 내에 4-H운동 전파를 위해 미군정하에서 행정력을 강력히 발휘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더불어 경기도지사 구자옥(具慈玉, 1950년 여름 북한에 납치됨)이 4-H운동의 중요성을 인식, 이를 잘 관리해 전 경기도 내에 5만여명의 4-H회원과 1900여개 구락부를 조직 육성하고 각 시군에는 유급 전임 지도자 56명을 배치하여 4-H육성에 큰 힘을 모았다.
앤더슨의 강력한 추진력은 경기도4-H가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한국4-H운동의 전국 확산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톡톡히 발휘하였는바 오늘의 여러분과 450만 전국4-H동문들의 추억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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