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02-15 격주간 제823호> |
|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③ |
한국4-H 탄생 숨겨진 이야기
연포(燕浦) 강 건 주 고문(한국4-H본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그 아름다운 존재 가치와 심원한 창조의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한국4-H에도 이와 같은 숨겨진 비사가 없을 수 없다. 무중생육(無中生育), 우리 4-H 탄생 원천을 찾아 6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로 하겠다.
한국4-H는 제2차 세계대전 종식과 더불어 탄생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그러나 탄생 동기는 아직껏 공개된 바가 없다. 이번 호에는 필자가 알고 있는 숨은 진실에 대해 증언토록 하겠다.
광복과 함께 1945년 9월, 온 겨레가 독립의 기쁨에 만취해 있을 때 미 육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행정권 인수 차 서울에 진주했다. 새로운 서양 풍물도 동시에 홍수처럼 여과 없이 무분별하게 밀려들어왔다. 당시 우리사회는 무질서, 경제파탄, 이념 갈등 등으로 민생은 극악의 극치였다. 미군정 당국과 우리 파트너들은 당시 동서양의 사색 격차, 현지 행정에 대한 경험부족, 한·미간 소통 부족 등으로 민생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했다. 1945년 가을 쌀 1800만석이란 풍작을 기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상모리배(奸商謀利輩)들의 쌀 매점행위, 생활물가 300% 폭등과 설상가상 1946년 여름의 대홍수는 농촌에 큰 피해를 입혔다. 참고로 1944년 당시 한반도 인구는 3100만명, 1946년 38도선 이남 인구는 약 2010만명이었다. 전체 인구의 약 76%가 농촌 인구였다. 2012년 농가 인구는 291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5.8%에 불과하다. 해방 후 미군정은 이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나아갈 바를 몰랐다. 당시 경기도(서울시 포함) 미군정지사는 찰스 앤더슨(Charls A. Anderson) 중령(1894~1973)이었다. 미국 네브라스카주 치과대를 졸업한 그는 1941년 미 육군에 입대해 1945년 경기도 미군정지사, 1950년 주한 미대사관 육군 무관장을 지내고 1954년 대령으로 전역했다. 이후 한국4-H에 지원해 한미재단 4-H고문으로 활동했다. 앤더슨 경기도 미군정지사는 산하에 한국 저명인사들로 구성된 경기도 미군정자문단(60명과 고문 2인)과 심각한 농촌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모로 노력한 바 있었다.
그중 김동성(千里駒 金東成, 1890~1968) 선생이 고문으로 있었다. 그는 미국 오하이오주립농대를 졸업하고 1920년 동아일보 창간기자를 시작으로 해외 첫 특파원, 1921년 만국기자 대회부의장, 1925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 고문, 2대 민의원 부의장, UN한국대표, 대한민국 초대 공보처장을 역임했다. 특히 영국여왕 대관식에 참석했으며, 중남미 대통령 특사, 국회사무 총장, 1947년 경기도 농촌청년클럽연합회(4-H클럽) 창립 발기인, 1954년 한국4-H중앙위원회(현 한국4-H본부) 발기인회 부회장을 맡아 4-H의 탄생과 발전에 기여했다.
김동성 고문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민족독립과 나라사랑에 온 몸을 바치신 분이었다. 미국 유학시절 감동 깊게 관찰한 그는 미국4-H클럽 회원들 활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앤더슨 지사에게 경기도 농촌에 4-H클럽 활동을 즉시 도입할 것을 제의하여 승낙을 얻었다. 4-H클럽 활동은 경기도 자문회의의 만장일치 결의를 거쳐 이 땅에 4-H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이때가 1946년 7월이었다. 당시 최응복 경기도 산업국장은 즉시 농무과에 경기도 4-H부를 설치, 직원 4인을 채용(조직훈련, 행사, 여회원, 생활개선 담당 등)함으로써 정식으로 활동을 개시한 것이 1947년 4월이라 한다.
만성화된 우리 농촌의 빈곤에 대한 한(恨)을 과감히 뛰어넘어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민족의 새로운 가치관 확립을 추진하고자 한국4-H는 첫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경기도 미군정지사 앤더슨은 4-H운동을 강력히 전개했으며, 이후 대한민국수립(1948년) 후 경기도지사 구자옥(具慈玉)은 한국전쟁으로 납북되기 전까지 4-H운동을 도내에서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기록은 1950년 이후 이 글을 집필하는 만경(萬頃)생이 수차의 4-H사업 발전실무회의 석상에서 당사자들과의 대화에서 청취한 소중한 기록임을 덧붙인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