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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1 격주간 제82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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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탐방] 국민정신혁명 이끈 평생교육운동의 선구자 |
김 일 주 원장 (한국지도자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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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주 원장은 1959년부터 농민교육원, 새마을교육원을 거쳐 현재 한국지도자아카데미에 이르기까지 97만여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
우리나라 농촌운동, 더 나아가 국민정신운동의 선구자인 김일주 한국지도자아카데미 원장(84)을 만났다. 그는 1959년 제1회 농촌지도자연수훈련을 시작으로 농민교육원, 새마을교육원을 거쳐 현재 한국지도자아카데미에 이르기까지 97만여 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 그가 1954년에 설립한 한국농촌문화연구회에서는 4-H운동의 전 현직 중견지도자를 비롯한 훌륭한 농촌지도자들이 활동했다.
경기 안양시 동안구 관양동에 있는 한국지도자아카데미. 8만4000여㎡(건평 3300㎡)의 연수원에는 벽돌 한 장, 나무 한 그루에도 김 원장의 뜨거운 열정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뒤늦게 찾아온 겨울 한파 속에서 만난 김 원장은 84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정정하면서도 추위가 범접하지 못할 만큼 말에 힘이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정신혁명, 정치혁명, 기술혁명, 생활혁명을 가져온 인본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를 이룩했다.”고 말했다. 그에게서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한 원로 운동가의 기개가 물씬 풍겼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품은 꿈
이 위인은 아픈 우리 현대사를 딛고 탄생했다. 6.25전쟁 당시 국군이 북진했을 때였다. 함경북도 단천군에서 학교에 다니던 김 원장은 한국군에 입대하게 된다. 1.4후퇴로 강원도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학도병 출신들은 학교로 복귀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남쪽에 연고가 없던 김 원장은 충남 천안삼거리에 있던 한 농가에서 쌀 7가마니를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머슴으로 일하게 된다.
돈을 벌어서 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했지만 세상살이가 그리 녹녹치 않았다. 열심히 일했으나 쌀을 8말밖에 받지 못했다. 처음 계획이 무너지자 모든 걸 포기하게 되었다. 북파간첩으로 자원해 북에 가서 임무를 완수한 뒤에 부모님 얼굴을 보고 죽으려고 했다.
1952년 겨울, 아직 전쟁 중이었다. 서울로 올라왔으나 민간인은 강을 건널 수 없었다. 당시 여의도는 비행장이었다. 도강하기 위해 백사장을 타고 올라오다가 그만 미군 보초병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 병사는 총구로 김 원장이 메고 있던 배낭을 쑤시자 마침 맨 위에 있던 ‘에이브러험 링컨전’이 나왔다.
보초병은 야전전화로 통역장교를 불렀다. 김 원장은 북한에서 군에 입대한 이야기부터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을 모두 털어놨다. 북파공작원으로 입대하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미군 병사는 눈물을 흘리며 담요 한 장을 주면서 한국에는 학교가 많더라, 열심히 공부해서 링컨 같은 지도자가 되라고 했다.
이때 김 원장의 진로가 결정됐다고 한다. 김 원장은 진로를 정하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고, 한순간 운명처럼 자신의 길이 정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국민교육운동의 산실이 된 연수원 건립이 이때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김 원장은 명동의 다방에서, 퇴계로의 한 자동차정비공장에서, 또 택시기사로도 일하며 돈을 모았다. 그리고 휘문고등하교 2학년에 편입을 했다.
1954년 졸업을 앞두고 대학에 갈 입학원서 살 돈도 없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김 원장을 찾는 분이 있다고 가서 만나보라고 했다. 바로 건국대학교 유석창 박사였다. 알고 보니 유 박사는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 김 원장이 객지에서 모진 고생을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유 박사의 도움으로 건국대학교에서 장학생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부모님이나 다름없던 유 박사의 영정사진은 지금도 지도자아카데미 원장실에 걸려있다.
국가발전 원동력이 된 인재 배출
김 원장이 농촌운동에 뛰어든 것은 고등학교 재학시절이었다. 1954년 한국농촌문화연구회를 설립하고 농촌마을에 문고를 설치해 독서운동을 펼쳤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농촌계몽운동을 계속했다. 1958년 졸업 후 조교로 발령을 받고 기숙사 사감이 되었다. 그런데 기숙사가 방학 중에는 텅 비어 있는 게 아닌가. 마을문고 대표들을 불러서 농촌지도자교육을 시키기로 했다. 유석창 박사는 어떻게 이런 기발한 생각을 했느냐며 교육비 일체를 학교에서 부담해 주었다. 농촌지도자교육은 제8기까지 건국대에서 실시됐다.
김 원장은 1967년 이탈리아의 ‘노동사회문제연구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이 학교는 이탈리아, 스위스, 독일, 덴마크, 스웨덴, 영국, 네덜란드, 미국 등 8개국에서 운영했다. 졸업 후에는 각 나라를 방문해 견문을 넓히게 된다. 김 원장은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1815년부터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평생국민운동, 독일에서는 피히테의 마을학교운동, 덴마크에서는 그룬투비의 국민고등학교운동에 주목했다. 모두 성인교육이었고 평생교육이었다. 출석부도 시험도 졸업장도 없는 자발적인 교육운동이었다. 농민교육에 대한 김 원장의 신념은 확고해졌다.
한국에 돌아와서 농민교육원 건립에 나섰다. 1968년 12월 연수원이 건립돼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국민정신교육운동을 전개하게 됐다. 건국대학교에서 진행되던 농촌지도자 연수훈련은 제9기부터 이곳에서 실시되었다.
1969년에는 월간 ‘농민문화’를 발간했다. 여기에는 농촌운동에 대한 이론과 실제 활동내용이 생생하게 담겼다. 4-H발전방향을 모색하는 특집을 비롯해 4-H활성화를 위한 기사도 수시로 게재됐다. 이 잡지는 1980년 언론통폐합까지 통권 제131호 발간됐다.
1972년 새마을운동이 시작됐다. 이미 4-H운동과 김 원장의 농민교육이 앞서 추진되어 농업기술과 지붕 및 부엌개량, 농로확장 등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렇게 이미 준비된 토대 위에서 새마을운동이 추진되었기에 전국적으로 확산돼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김 원장은 ‘농민문화’ 1972년 4월호를 통해 새마을운동에 앞서 새마음운동을 전개하자면서 인본주의를 강조하기도 했다.
김 원장은 자신이 외길인생을 걸었던 국민정신운동의 법적·정책적 뒷받침을 위해 1997년 국회의원에 당선돼 활약했다. 또 ‘새마을운동의 사회교육적 접근’을 비롯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남겼다. 지난해에는 한국4-H본부 고문에 위촉됐다.
김 원장은 “한국혁명으로 명명할 수 있는 농촌근대화와 산업화는 4-H동지들의 피와 땀의 결정체”라고 치하하면서, “4-H가 다시 한 번 국가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조두현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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