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5 격주간 제821호>
원로지도자의 4-H이야기 ‘만경(萬頃)’①
4-H 의‘H’와 부락 어르신들

연포(燕浦) 강 건 주 고문(한국4-H본부)

역사를 통해 오늘을 해석할 수 있고, 역사를 알아야 미래가 예측된다고 했다. 이 땅에 4-H네잎클로버의 씨앗이 뿌려지던 그때부터 어언 70년 가까운 세월을 4-H운동에 몸담으며 살아왔다.
필자가 경험한 4-H역사를 후배들에게 얘기해줘서 4-H의 역사가 미래의 발전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4-H역사를 에피소드 형식으로 얘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4-H신문에 ‘만경(萬頃)’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하게 됐다.
‘만경(萬頃)’이란 ‘백만 밭이랑’이라는 뜻이며, 지면이나 수면이 아주 넓음을 일컫는 말인데 무한함, 거대함, 막대함이란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 코너의 이름을 만경이라 짓게 된 것은 4-H운동은 영구적이고, 무한하며,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4-H과제는 제한이 없다. 4-H회원들의 희망은 무한하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상호 협조를 통해 4-H운동을 전 세계에 승화시켜 나가야한다.
무한하고 원대한 4-H운동, 그러니 4-H역사를 되짚어 보는 코너의 이름으로 만경이 잘 맞지 않는가.

자,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며 4-H 의 ‘H’ 와 관련한 옛 추억을 되살려 봐야겠다.
때는 1953년 여름, 한국4-H운동 전국 태동기였다. 만경생이 4-H운동의 전국 확산을 위한 기초 조사차 농림부 농사교도과, 경상북도청 농무과 직원들과 전국을 순방하던 중 경상북도에서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다.
요새 말로 치면 ‘현지 모니터링’ 중이었다. 당시의 빨래판 같은 국도를 덜커덩 거리며 엷은 흰색 흙먼지를 뒤집어 쓰면서 달리던 차는 경산군의 한 마을 앞을 지나고 있었다. 어디선가 풍악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우리는 흥미 반, 업무 반으로 부락 입구에서 쉬기도 할 겸 구경하기로 했다.
부락 노인들 너 댓 명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우리 일행에게 묻는다.
“누구시니껴?” 강한 경상도 사투리다. 도청직원이 우리 일행의 소속과 행방을 정중히 설명 드리니 막걸리에 얼큰한 이들은 거침없이 우리를 부락 축제 한복판으로 끌고 간 후 넓은 멍석 위에 앉히더니, 한상 푸짐하게 차려 나왔다. 듣자하니 바로 부락 지도급 어르신의 환갑잔치 날이었다. 부락민들이 즐기는 오늘은 우리에게 최고의 기회였다.
우리 일행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적기에, 적소에 온 것이다. 좌석에서 흉금을 털어 놓고 자유토론회가 벌어졌다. 부락민들의 농촌지도사업(당시 농사교도사업)과 4-H운동에 대한 관심은 전향적이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4-H운동이 아직까지 미미한 시절이었으나 이들 농민들의 관심은 유별났다.
농민들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은 엄청났다. 우리는 부락 핵심체인 어르신들에게 가급적 풍부한 4-H 관련 정보를 알기 쉽게 전달하려고 진땀을 뺐다.
부락민들과의 4-H운동 공감대 형성에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자체 평가했다.
부락 어르신들과 대화 중 이들은 서슴없이 4-H를 “4월(月) 구락부? 4일(日) 구락부?”로 각양각색으로 부르셨다. 우리 일행은 실색과 함께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사실 한글도 제대로 해득 못하던 시절이라, 소박한 농촌 어르신들(당시 50~60 대)이 영어 알파벳을 알리 만무했다. 이 순간 우리는 사태가 중대함을 깨닫게 됐다. 부락에 배포된 색 바랜 4-H광고 팜플릿(당시 경제원조 당국에서 배포) 등에서 영어 ‘H’ 자를 한자의 ‘날 日’ 자, 혹은 ‘달 月’ 자로 오독하고 보기 좋게 제멋대로 용감하게 “4-월 구락부, 4-일 구락부” 로 부르시며 이를 되풀이 하는 것이었다.
만경생은 당시 타지방에서도 유사한 웃지 못 할 ‘사건’을 체험한 바 있었다. 배꼽을 뺀 기억이 새롭다.
이 해프닝은 우리 4-H지도 실무자들의 앞날을 위한 일대 전환점을 시사해 주는 계기가 됐다.

4-H운동이 아직까지 미미한 시절이었으나 이들 농민들의 관심은 유별났다. 농민들 자신의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은 엄청났다(사진은 1950년대 가축기르기 4-H과제활동(좌)과 4-H활동 시상(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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