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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1 격주간 제8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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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 탐방] 클로버 향기 물씬 풍기는 ‘자랑스러운 4-H인’ |
김 성 훈 고문 (한국4-H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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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4-H본부 고문으로 있는 김성훈 전 장관은 농학자, 시민운동가, 관료로 활동하면서 농업·환경·생명의 가치를 높이는데 평생을 바쳐왔다. |
‘자랑스러운 4-H인’을 말할 때면 대부분의 4-H인들은 김성훈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을 첫 번째로 꼽는다. 한국4-H본부 고문으로 있는 김 전 장관은 농학자, 시민운동가, 관료로 활동하면서 농업과 환경, 생명의 가치를 높이는데 평생을 바쳐왔다. 김 고문은 자신이 살아온 삶은 중학교 때 만난 4-H가 밑바탕이 되었다고 스스로 밝힌다. 그는 지난 2007년 한국4-H운동 60주년을 맞아 450만 4-H인의 이름으로 제정된 제1회 자랑스러운 4-H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리트머스 시험지’ 전설의 주인공
병신년(丙申年) 새해를 앞두고 한국4-H운동의 전설, 김성훈 고문을 찾았다. 김 고문은 늘 넥타이 대신 4-H타이슬링을 매고 다닌다. 왼쪽 가슴에는 4-H뺏지와 그 아래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이 눈에 띈다. 기자는 말로만 들었던 ‘리트머스 시험지’의 전설에 대해 그 전설의 주인공인 김 고문에게서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김 고문은 15살 때인 1954년 전남 목포와 무안의 경계에 있는 산정마을에서 4-H활동을 시작했다. 산정4-H구락부는 부친인 김홍근 옹이 설립했다. 부친은 일제 강점기에 협동조합운동을 펼쳐 일본군의 감시를 받다가 광주교도소에서 미결수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만주로 피신했다가 광복 후에 돌아와 농촌운동을 펼친 분이었다.
이 마을 4-H지도자는 한창수 옹이었다. 손으로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재주가 많은 분이라고 했다. 그분의 지도를 받으면서 초대 4-H회장을 맡아 활동했다. 4-H활동을 하며 민주주의적인 회의진행법을 배웠다. 당시에는 손 글씨로 필경을 해 프린트한 유인물을 보고 회의생활을 익혔다고 했다.
4-H과제활동은 현실에서 자기 주변의 문제를 찾아 해결하는 것이었다. 닭도 기르고 오리도 길렀지만 토양산성도(Ph)를 측정해 생산성을 높이는 과제를 선택했다. 4-H회원들과 리트머스 시험지로 논밭을 다니면서 토양을 검사했다. 시청에 가서 지적도 청사진을 떠서 그 위에 시험결과를 표시했다. 당시는 원조물자로 설탕과 화학비료를 무상으로 나눠주던 때였다. 아이들은 설탕을 많이 먹어 이가 썩었고 비료를 마구 뿌려 논밭은 급격히 산성화가 진행돼 생산성이 떨어졌다.
토양성분지도를 만들어 농가마다 다니면서 설득했다. 꼴을 베고 볏짚으로 유기질 퇴비를 만들어 많이 넣어줘야 한다고 했다. 유기질 퇴비를 만드는 시범도 보여줬다. 이런 설득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은 귀찮아하며 잘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토양성분지도대로 수확량이 달리 나오는 것을 본 농민들의 생각도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이 과제로 목포·무안4-H경진대회에서 1등을 했다. 광주에서 열린 전남4-H경진대회에서도 1등을 차지했다. 드디어 1957년 4-H중앙경진대회가 열렸다. 생전 처음으로 목포를 벗어나 수원 땅을 밟았다. 하지만 입상하지 못했다. 이유는 4-H회원이 한 과제로 보기가 어려워 직접 현장에 가서 확인해 봐야한다는 것이었다.
리트머스 시험지를 들고 동네 토양을 검사하던 소년은 40여년이 지난 1998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한 일이 생협 법안을 만들어 친환경 유기농을 하도록 한 것이었다. “유기농업의 비결은 땅, 바로 흙을 살리는 일부터 시작한다.”는 김 고문은, “유기농은 안전한 농산물뿐만 아니라 흙을 살려서 환경과 생태계를 살려나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진도 용산마을에 세워진 노래비
김성훈 고문은 1958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했다. 중앙경진대회 이후 두 번째 수도권 진입이었다. 대학에 4-H연구회가 조직되어 정석균, 김주읍 선배가 활동하고 있었다. 자신은 전통4-H맨이 아닌가. 대학에서도 신나게 4-H활동을 펼쳐 서울대4-H연구회 회장을 지냈다
김 고문은 대학4-H와 함께 대학농촌연구부 활동에도 열심을 냈다. 그리고 전국대학농촌연구부 초대회장을 맡았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겨울방학에는 진도군 임해면 용산마을에서, 여름에는 신안군 하의도 대리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공교롭게도 하의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었다.
3년간 지속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면서 마을 아이들을 모아 4-H회를 조직해 지도하고 마을노래도 만들어 부르게 했다. 이로부터 40년이 지나 1998년 장관이 된 김 고문은 ‘이동장관실’을 운영했다. 마을 가운데 큰 마당에 천막을 치고 농민들의 애환을 직접 들었다. 한번은 대학시절 3년간 봉사활동을 펼쳤던 용산마을에서 이동장관실을 갖게 됐다. 이 마을에 들어선 그를 반기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40년 전 학생이 장관되어 돌아왔네.”
이동장관실을 운영하는데 툇마루에서 몇몇 할머니들이 수군대고 있었다. “할머니, 저를 아세요?”라는 물음에 “알다마다요. 내가 새색시 때 밥을 해준 학생이 아닙니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마을에서 10ha이하의 경지정리와 어촌까지 길을 연결하는 임도를 만드는 숙원사업을 해결해 주었다.
장관 퇴임 후 용산마을에 6m나 되는 커다란 자연석 노래비가 세워졌다. “여귀산 기슭에 아늑한 마을. 순박한 마음들이 하나가 되어…” 대학시절 지어준 마을노래였다.
농촌봉사활동을 함께 다니던 5명이 올해 이 마을을 다시 찾았다. 당시 4-H회원들이 농협조합장, 군의원 등 다 지내고 같이 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임해면에 있는 항구가 바로 팽목항이 아닌가. 아직 인양하지 못한 분들의 사진과 이름, 나이가 내걸려 있었다. 그 중에 제주도로 귀촌하기 위해 가던 일가 중 배와 함께 침몰한 7살 권혁주 어린이가 눈길을 끌었다. “그 아이가 우리 곁에 돌아올 때까지 이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닐 겁니다.”라는 김 고문의 목소리가 떨렸다.
머문 자리에 향기를 남기는 사람
김성훈 고문에게 큰 영향을 준 4-H활동 가운데 하나가 4-H국제교환훈련(IFYE)이었다. 1964년에 3개월간 대만으로 파견되었는데 갈 때는 화물선을 타고, 올 때는 일본까지 배를 타고 일본에서 다시 비행기를 탔다. 대만에서는 ‘풀뿌리대사(草根大使, Grass-root Ambassador)’로 극진히 맞아주었다. 이때 배운 중국어로 어설프게나마 18차례의 중국방문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3명의 농촌운동지도자에게 훈장을 주었다. 한분은 산정4-H구락부에서 자신을 지도했던 한창수 선생과 대학4-H선배인 정석균 선생 그리고 4-H에 평생을 바친 황인호 선생이었다. 황인호 선생은 4-H의 큰 별이었지만 그만큼 가정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장관실에 가족들을 모두 초청해 훈장을 드리면서 그분이 작사한 노래를 큰 소리고 직접 불러드렸다. 가족들이 그분의 업적에 다소나마 위안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였단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김 고문은 옥잠화의 향기가 그윽이 담겨있는 향기종이에 인쇄된 명함을 주었다. “자기가 머문 자리에 향기는 남기지 못할지언정 구린내는 남기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있던 자리에서 떠나면 꼭 비리로 구린내를 풍기는 인사들에게 이 명함을 주고 싶다고 했다. 홍보부장, 회장, 장관 등의 크고 작은 자리에 향기를 남기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했다. 그러고 보니 김 고문과 2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는 동안 기자는 김 고문이 물씬 풍기는 네잎클로버 향기에 깊이 취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조두현 부장 dhcho@4-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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