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5 격주간 제817호>
[지도자 탐방] ‘4-H활동은 귀중한 인생의 자산’ 삶으로 보여줘
김 성 수  자문위원 (한국4-H본부)

김성수 자문위원은 “농촌·청소년문화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봉사하며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이 보람이자 즐거움이었다.”고 했다.
김성수 자문위원과 기자와의 첫 만남은 13년 전 한국4-H신문 편집자문위원회의에서였다. 회의 전에 한국4-H본부에서 근무하던 그분의 제자가 그분은 ‘참 스승’의 표본이라는 것과 ‘말 술’이라는 정보를 일러줬다. 그 이후 13년간 참 스승의 모습을 보면서, 또 가끔씩은 황송스럽게도 감히 술잔을 함께 기울이기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도움을 받으면서 지내왔다.
김 자문위원은 2010년 30여 년간 몸담았던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 교수를 정년퇴직했다. 지난해 말에는 한국4-H본부 부설 농촌·청소년문화연구소장직도 퇴임하고 한국4-H본부 자문위원으로 위촉됐다.
과천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를 만난 김 자문위원은 “대한민국의 초·중·고 청소년들이 4-H회에서 꿈을 갖고 지·덕·노·체의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4-H이념으로 학교폭력 등 청소년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4-H만 제대로 체득하면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 성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4-H회의록 작성이 생애기술로

김 자문위원은 4-H활동이 귀중한 인생의 자산이라는 것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줬다. 해방이 되던 1945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김 자문위원은 4학년 때 선동마을4-H구락부에서 서기를 맡은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한다. 당시 자원지도자로부터 회의록 작성 훈련을 받은 것이 중학교 때 노트정리에서부터 대학에서 4-H동아리 활동은 물론 대학교수 회의록 작성까지 생활기술(life-skill)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고창중학교에 입학해서는 농업선생님의 애정 어린 격려가 농업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고, 광주고등학교에서도 농업을 배울 수 있었다. 이때 의대에 진학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농대를 선택한 것도 4-H와의 인연이 그 뿌리가 되었다고 회상한다.
1963년 서울대 농대에 입학한 김 자문위원은 대학4-H연구회에서 농업·농촌·농민 문제를 선배들과 함께 고민하며 토론을 통해 배우는 계기가 됐다. 대학4-H연구회는 향토개척단, 야학연구회, 독농가연구회, 덴마크·이스라엘연구회, 한얼, 농사단 등과 협력하여 농촌 개척을 위한 연구와 봉사에 열심을 냈다.
특히 농촌마을4-H 활성화를 위한 연구 토론 등을 통해 4-H운동의 한국화, 토착화 방안 등을 모색했다. 방학을 이용해 농촌봉사활동을 펼쳐 낮에는 농민들과 논밭에서 영농봉사를, 밤에는 대화를 통한 농촌 발전 방안을 토론했다. 또 초·중등학생들의 실력 향상을 위한 교육봉사를 실천했다.
1964년 여름에 달성군 옥포면 강림리에서 가진 농촌봉사활동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란다. 피사리와 밭일 외에도 밥 짓고 설거지를 하기 위해 동네 샘물에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 날랐다고 한다. 이때 뾰쪽한 삼각 자갈들이 박혀 있는 길을 맨발로 뛰어다니던 일들이 어제 일처럼 환하게 떠오른다고 한다.

군사정부 시절 대학4-H활동 재개

김 자문위원은 대학을 졸업하고 ROTC장교로 제대 후 대학원을 마쳤다. 197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해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연구원으로 있다가 1981년 모교의 교수를 맡게 됐다. 학원자율화와 민주화의 열망 속에서 학생들 사이에 ‘짭새’로 불리는 경찰이 캠퍼스에 상주하던 때였다. 대부분의 ‘문제’동아리는 지도교수를 찾지 못해 ‘비인가’로 숨어 지내야 했다.
이때 ‘천지’를 모르던 신임 김성수 교수의 날인으로 대학4-H연구회가 인가를 받아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대학4-H연구회는 농촌·농업발전과 농민소득 증대를 위한 농업정책 방향 토론을 위한 제1회 ‘농정토론회’를 개최했다. 학내 교수와 학생은 물론 ‘짭새’ 경찰의 비상한 관심 속에 관객이 대강당을 가득 채웠다. ‘문제동아리’의 ‘문제행사’는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대학4-H활동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해 30년 동안 지도교수로, 졸업생들의 주례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고 김 자문위원은 말한다. 그동안 배출한 제자들만 해도 수없이 많다. 대학은 물론 정치계, 행정부처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저명인사도 수두룩하다. 일명 ‘김성수사단’으로 불리기도 한다.
80년대 군사정부 시절 당시 위세(?)를 떨치던 농대출신 인물의 장관취임식이 있었다. 학교에서는 축하연에 갈 버스를 대기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상담을 하기 위해 찾아왔다. 김 자문위원은 장관 축하연을 포기하고 학생과 마주앉았다. 소주잔을 주고받은 것은 물론이다. 이 학생은 대학원에 진학했고 후에 군수와 도지사를 거쳐 국회의원이 됐다.

4-H갖춘 인재 길러내는데 힘써

김 자문위원은 장관 축하연보다 학생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순간이 더 가치있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사실 그는 제자들과 술이 아니라 삶을 나누었고 그들의 갈증을 풀어줬고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했던 것이다.
김 자문위원은 “지·덕·노·체를 갖춘 인재를 길러내는데 뒤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했다. 바로 4-H정신으로 인재를 길러왔고 그 결과 서울대의 많은 단과대학 가운데서도 농교육과가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농촌·청소년문화연구소와의 인연으로 4-H지도교사 연수, 4-H대상 심사, 농촌청소년백서 발간, 국제겨울캠프, 아시아4-H네트워크와 글로벌4-H네트워크 세계대회에 이르기까지 봉사하며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즐거움이자 보람이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4-H회원들에게 “4-H의 향기가 자신에게 배어들어 건강하게 살아가는 양분이 될 것이라 믿는다.”면서, “4-H와의 인연으로 자신의 삶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가꿔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조두현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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