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15 격주간 제817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

"얼음이 녹아 대지를 적시듯이
渙然氷釋(환연빙석)
-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 중에서"

자신의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강한 권력욕을 지닌 사람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에도 혹시나 권력을 다시 빼앗길까 두려워 단종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권세에 대한 그의 집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그의 심정이 편안한 것은 아니었다. 평생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야 했다.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많은 사람들이 꿈에 나타나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다. 단종의 어머니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침을 뱉었는데 침 맞은 자리에 실제로 종기가 돋아 극심한 피부병을 앓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병치레가 잦았던 세조는 많은 의사를 만나보았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직접 의학 공부에 매진하기도 했다. 직접 저술한 의학서 ‘의약론(醫藥論)’은 그의 의학 공부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세조는 ‘의약론’에서 의사를 8가지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세조가 분류한 8가지 의사는 다음과 같다.

1. 심의(心醫) : 글자 그대로 마음을 치료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2. 식의(食醫) : 음식으로 환자를 치료한다. 독하고 쓴 약을 주지 않고 맛나게 음식을 먹는 것으로 병을 치료한다.
3. 약의(藥醫) : 오직 약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4. 혼의(昏醫) : 환자보다 자신이 더 흥분한다. 유난을 떨면서 혼란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모르고 버벅거리기만 한다.
5. 광의(狂醫) : 환자를 세심히 살피지 않고 자신의 기분에 따라 자기 맘대로 마구잡이 처방과 치료를 남발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만만하여 귀신도 제압할 수 있다고 떠든다.
6. 망의(妄醫) : 병이 없는데도 있다고 말하며 함부로 치료하면서 여기가 아픈데 저기를 치료한다.
7. 사의(詐醫) : 돈 많은 사람이 찾아오면 없는 병도 있다며 속이고 치료비를 부풀려 받으며 가난한 사람이 찾아오면 있는 병도 없다며 외면한다. 간단한 치료면 충분함에도 엄청난 과잉진료로 사기를 친다.
8. 살의(殺醫) : 의학적 지식도 있고 나름 실력도 갖추었다. 그런데 사람을 치료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병과 싸워 이기려고 한다. 사람은 안중에도 없다.

세조가 말한 8가지 의사 중에 최고의 의사는 마음을 치료하는 의사, 심의다. 그다음은 음식으로 치료하는 식의라고 하겠다. 약으로 치료하는 의사는 나머지 5가지 의사에 비하면 그나마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의약론(醫藥論)’을 쓰며 세조는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세조는 말년에 자신으로 말미암아 희생당한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전국의 사찰을 돌며 ‘천도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가 꼽은 의사의 분류에는 많은 함의가 숨어 있다고 해도 무방하리라.
환자를 치료하는 게 의사라면 세상을 치료하는 사람은 정치인이 아닐까.
진(晉)나라의 학자이자 정치인이었던 두원개(杜元凱, 222~284)는 이전까지 서로 따로 존재하고 있던 ‘춘추(春秋)’와 ‘좌씨전(左氏傳)’을 한 권의 책으로 통합 정리하며 그 서문에 이렇게 썼다. “강물과 바닷물의 침식작용처럼, 빗물이 땅을 촉촉하게 해주는 것처럼, 얼음이 녹아 대지를 적시듯이(江海之浸, 膏澤之潤, 渙然氷釋).”
두원개가 강조한 것은 공감과 소통이다. 무리수를 두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두르지 말고 충분히 공감하고 소통하라고 그는 강조한다. 실제로 성과를 올리지 못한다 하더라도 공감을 얻는다면 성공이 아닐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다면 성과는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심의(心醫)와 두원개(杜元凱)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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