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01 격주간 제814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배움의 시작점

"어찌 부모를 잊을 수 있겠는가
君子於親 終身不忘(군자어친 종신불망)
- 《성학집요(聖學輯要)》 중에서"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이 지났다. 부모님을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조상들에게도 인사를 드리는 것이 추석의 의미다. 그런데 추석 명절의 후유증도 만만치 않다는 이야기도 여기저기서 들린다.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끼리 다투기도 한다. 그래서 불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효(孝)에 대한 인식이 바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유학(儒學)에서는 특히 부모에 대한 효(孝)를 강조한다. 그 이유를 바르게 알아야 한다. 효도를 말할 때의 ‘효(孝)’는 ‘본받다, 배우다’는 뜻을 가진 ‘효(效)’와도 연결된다. 부모를 보며 본받고 배우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효(孝)’는 ‘효(效)’다.
부모를 잊지 말라는 뜻은 우주를 잊지 말라는 것과 연결된다. 유학(儒學)에서는 우주가 탄생될 때가 생명의 시작점이라고 말한다. 나의 시작점이 부모인 것처럼 세상의 시작점은 우주 탄생이다. 그러므로 배움이 부모에게 연결되면 효(孝)가 되고, 배움이 우주로 연결되면 효(效)가 된다.
아침에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드는 이유는 이 지구가 자전하는 주기에 순응하며 따라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배운다. 그것이 효(效)다. 그것을 거슬러 밤에 일어나고 아침에 잠자리에 들면 병이 생긴다. 자연의 모습을 보며 그것을 따라하며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때론 자연이 이상하게 돌아갈 때도 있다. 이상기후가 보이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 등이 그것이다. 이럴 때에는 맞서 싸우지 않고 조용히 기다린다. 평온을 되찾을 때까지, 평정을 되찾을 때까지 기다린다.
마찬가지다.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준 것은 부모다. 그러므로 나의 친인척들은 모두가 나의 부모와 연결된 사람들이다. 그들을 대할 때 부모를 대하는 것처럼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을 계속 이어가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부모처럼 대해야 한다. 그것이 ‘경(敬)’이다.
단순히 부모에게 고개를 숙이고 복종하는 게 효(孝)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배우는 게 있어야 효(孝)다. 부모가 못났더라도 부모가 바르지 않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런 모습을 통해 바른 것이 무엇인지 배우고 그렇게 잘 배워서 부모까지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진정한 효(孝)다.
어떤 사람은 제사를 잘 지내는 게 효(孝)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제사도 형식에 얽매이면 안 된다.
“제사를 너무 자주 지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면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 번거롭다고 느끼게 되고 결국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마음까지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예법의 기본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예법이 아니라는 뜻이다.
“어찌 부모를 잊을 수 있겠는가(君子於親 終身不忘)”는 중국 송나라의 학자 보광(輔廣)의 말이다. 이 말의 깊은 뜻도 마찬가지다. 자연의 이치까지 이어진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 태극(太極)이 움직이며 음양을 만들어내는 그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까지 연결되는 말이다. 빅뱅의 순간 만들어진 수많은 것들이 모여 생명을 만들었으니 나 또한 수많은 것의 결합체다. 세상 모든 것이 내 부모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리고 낙엽이 지면,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하다. 다가올 추위 때문이 아니다. 낙엽이 지듯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어쩌나 걱정되기 때문이다. 봄이 되어 비가 땅을 적시고 새싹이 돋아나면, 마음이 설렌다. 따스한 봄기운 때문이 아니다. 다시 봄이 찾아오듯 돌아가신 부모님이 다시 돌아오시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예기(禮記)’에 나오는 말이다. 계절의 순환을 보며 부모를 생각하고 또 우주탄생의 순간을 떠올린다. 진정한 효(孝)는 겸손에서 출발한다. 배우는 자세로 모든 것을 대해야 한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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