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15 격주간 제813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가을을 맞이하는 자세

"시험 성적대로 서열을 매기는 것은 옳지 않다
更不考定高下(갱불고정고하)
- 《근사록(近思錄)》 중에서"


가을은 풍요로운 계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계절은 아니다. 봄과 여름에 열심히 일한 결과를 받아드는 때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풍요롭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가을 수확은 농부에게 성적표와 같다. 지난 시간을 얼마나 알차게 보냈는지에 대한 결과표를 받아드는 것과 다르지 않다.
농부에게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다. 1년을 마무리하며 성적표를 받아드는 시기는 농부들의 가을과 같다. 봄에 신학기를 시작하여 뜨거운 여름을 보낸 이후에 시험을 치르고, 그 시험에 대한 성적표를 받아드는 시기도 결실의 계절이다.
그런데 성적표를 받는 시기의 마음은 어떠한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에 동의할 수 있을까. 설렘보다는 두려움이, 기쁨보다는 열패감이, 풍요로움보다는 초라함이 앞섰던 기억을 지닌 사람이 많을 것이다. 풍요롭고 즐거운 결실의 계절이 왜 초라하고 두려운 계절로 변한 것일까. 시험의 결과에만 너무 집착했기 때문은 아닐까.
현명한 농부는 1년 농사로 성패를 따지지 않는다. 가을 수확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확이 끝나면 바로 그 순간부터 내년 봄을 준비해야 한다. 봄에 뿌릴 씨앗도 준비하고 추운 겨울을 맞이할 준비도 해야 한다. 그러니 수확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시작이었다. 수확은 농부를 평가하는 성적표이기에 앞서 내년 농사를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계획서라고 할 수 있다.
A라는 작물의 수확이 좋지 않았다면 그 이유를 따져 미리 대비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B라는 작물이 풍년이었다면 이것을 어떻게 유지하고 더 발전시킬 여지는 없는지 따져보며 계획을 세워야 한다. 1년 농사짓고 멀리 떠날 사람이 아니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가을 수확은 그 수확량의 많고 적음에 앞서 내일의 희망을 꿈꿀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고맙고 소중한 신의 계시와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1년 동안 열심히 일한 농부는 그 결과로 내년 농사에 사용할 수 있는 소중한 지혜를 얻게 된다. 수확한 작물로 배를 채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농사의 결과물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던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혜안을 준다. 열심히 일하지 않는 농부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는 소중한 정보를 손에 쥐게 된다. 건성건성 대충 일한 농부는 결과물을 눈앞에 놓아줘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수확량의 많고 적음만 생각한다.
이것은 농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은 물론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모든 생활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시험과 성적표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적표는 멋진 보물섬으로 나를 인도해주는 지도와 같다. 보물섬 지도를 받는 데 왜 두렵겠는가.
송나라의 대학자 ‘정이(程)’는 당시 중국의 교육제도를 꼼꼼히 따져본 후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각 학교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방법을 자세히 살펴보니 대부분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학생들을 경쟁시켜 실력을 키우도록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무턱대고 시험을 치러 학생들을 성적으로 판단하고 성적대로 서열을 매기는 것은 옳지 않다(更不考定高下). 시험은 하나의 과제물과 같다.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 무엇에 대해 잘 알고 있고 무엇에 대해 잘 모르고 있는지 파악하여 그들을 돕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초라한 성적표는 없다. 의사가 주는 처방전은 ‘이대로 가면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읽는 게 아니라 ‘이렇게 하면 건강해집니다.’로 읽어야 한다.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선물이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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