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01 격주간 제812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거울을 보아야 하는 이유
"내 형제는 나와 한 몸이다
兄弟 與我如一身(형제 여아여일신)
- 《격몽요결(擊蒙要訣)》 중에서"


‘피를 나눈 형제자매는 특히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이 말은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다. 그러나 형제 사이의 다툼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다. 최근 우리나라의 재벌그룹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유교를 건국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도 다르지 않았다. 태조 이성계는 모두 8명의 아들을 두었다. 한씨와 사이에 6명, 강씨와 사이에 2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에 이방원은 한씨와 사이에서 다섯 번째로 낳은 아들이었다. 그는 형제들을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오른다.
부와 권력은 다툼으로 이어지기 쉽다. 그러나 부와 권력이 없다고 다툼도 없겠는가. 너무 가난하면 오히려 생존을 위해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결국 다툼의 원인은 부와 권력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바로 ‘효(孝)’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보더라도 그 출발점은 ‘효(孝)’라고 할 수 있다. 부모가 나를 낳아주었다. 나에게 생명을 준 존재다. 그러므로 이를 거역할 수 없다. 온갖 생명을 자라나게 하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단순히 윤리와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철학의 문제다. ‘중용(中庸)’의 첫머리를 보자.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우리는 우주탄생의 원리를 지니고 태어났다.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그 원리를 따르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 올바른 길을 이어가도록 스스로를 가다듬는 게 공부다.”
우주탄생의 원리, 천지창조의 원리, 자연의 법칙을 우리는 지니고 있다. 그것을 실생활에 구현하는 첫걸음이 효(孝)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윤리도덕이 아니라 우주탄생의 원리에 입각한 행위다. 나를 낳아준 부모는 천지자연과 같은 존재다. 부모의 부모로 계속 이어서 올라가면 거기에 우주탄생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효(孝)가 가지를 뻗으면 형제애가 된다. “내 형제는 나와 한 몸이다. 부모가 주신 몸을 함께 받았기 때문이다(兄弟 同受父母遺體 與我如一身).” 율곡이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효(孝)를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천지자연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떠하겠는가. 그들도 내 형제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들을 살펴보라. 모두 우주탄생의 순간에 만들어진 것들이 아닌가.
“세상의 모든 것들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居敬以立其本),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이치를 따져 옳고 그름을 밝히고(窮理以明乎善), 이를 행동으로 바르게 실천하는 것(力行以踐其實), 이 세 가지는 죽을 때까지 지켜나가야 한다(三者 終身事業也).”(‘격몽요결(擊蒙要訣)’ 중에서)
세상 모든 것을 공경하는 자세, 그 시작점이 바로 효(孝)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것을 지켜나가지 못할까. 철학이 아니라 고리타분한 생활지침이나 윤리도덕으로만 파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절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있고 형제자매의 모습이 있다. 우주탄생의 신비로운 순간이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숨은그림찾기는 거울을 보았을 때 이루어진다.
“우리 형님 얼굴과 수염은 누구를 닮았을까(我兄顔髮曾誰似) 돌아가신 아버님 생각날 때마다 우리 형님 얼굴을 바라보았지(每憶先君看我兄) 이제 형님이 돌아가셨으니 형님이 그리우면 누굴 보아야할까(今日思兄何處見) 단정하게 차려입고 냇가로 나가 냇물에 내 얼굴 비춰본다네(自將巾袂映溪行).”(연암(燕巖) 박지원이 돌아가신 형님을 그리워하며 쓴 시(詩), ‘형님을 그리워하며(燕巖憶先兄)’)
오늘 아침, 거울을 보면서 새로운 나를 발견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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