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효 재 회원(충남 논산대건고등학교4-H회)
댓잎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소리가 서글픈 마을이 있다. 무화과 그늘 아래에 앉아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소쩍새나 뻐꾸기 소리에 맞추어 멀리서 들려오던 마을 사람들의 노래 소리에 눈이 절로 감기던 곳. 연무대 구합선. 알싸한 모기향과 흙냄새가 꽃향기보다 따뜻했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품에 안겨 달콤한 꿈을 꿔본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부모님과의 이별보다 컴퓨터와의 이별이 더 서럽던 나에게 시골이란 쇠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그런 나에게 2주간 할머니, 할아버지와 시골에 있으라니, 아버지는 컴퓨터와 TV에 빠져 사는 나에게 최고의 체벌을 내리신 것이다. 몰래 닌텐도를 챙겼다는 생각에 작은 희열을 느끼며 가파른 경사를 열심히 올랐다. 첫날은 닌텐도가 잘 버텨 주었지만, 두 수 앞을 바라 본 아버지가 빼놓은 충전기가 나를 옥죄였다. 그렇게 나에게 힘겨운 둘째 날이 찾아왔다. 뒤늦게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았지만 잘 정리된 마당엔 땡볕만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미 혼자만의 시간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잔뜩 토라지고 말았다. 할머니가 피워놓은 모기향 주위에서 파리채를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기르는 개한테 애꿎은 장난을 쳤다. 끼니때가 한참이나 남았지만 실속 없는 움직임에 배까지 고파왔다.
할머니는 혼자 있을 손자 생각에 저녁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음에도 부랴부랴 오셨다. 밥상에는 갓 따온 상추와 바로 무친 비름나물, 향긋한 깻순나물, 말캉하고 쫄깃한 가지나물, 취나물, 고춧잎, 고구마순 등등 이름 모를 나물까지 정말 상다리가 휠 정도로 향긋한 밥상이었다. 아랫집에서 취나물과 고구마순을 갖다 줘서 밥상이 더 푸짐하다고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풀뿐이라며 툴툴거리는 나에겐 들리지 않았고, 투덜대는 입과 다르게 게걸스럽게 두 공기를 비워냈다. 입이 워낙 짧아 고기 없인 밥을 안 먹던 나였지만 그 때의 달콤 쌉쌀했던 상추와 입 안 가득 육즙처럼 채워주던 가지나물을, 새콤달콤 고구마순 생채를 잊지 못한다.
늦은 밤, 불빛 하나 없는 구합선 하늘엔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듯했고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톱에 낀 흙냄새와 향긋한 풀내음에 취해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소쩍새가 날이 졌음을 알리고, 수탉이 아침이 왔노라 울어댔다. 비몽사몽한 얼굴로 할머니 품에 안기자 매운 냄새가 났다. 마늘 냄새였다.
“할아버지가 안 온다. 아랫집이랑 건넛집 좀 댕겨와. 거 있을겨.”
할아버지는 그 무렵, 치매 증상이 종종 나타나셨다. 가끔 사라지시기도 했고, 우릴 못 알아보시기도 했다. 마늘 냄새 탓인지 어렸던 탓인지, 긴장이 풀려서 인지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앞집, 앞집, 옆집…. 줘야지. 할멈, 효재 할멈.”
할아버지는 마늘을 품에 꼭 안은 채로 아랫집 건넛집을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시며 중얼거리고 계셨다.
“할아버지, 빨리 가요. 할머니가 찾아요.”
“안돼요. 이거 희각네 갖다 줘야 돼. 댁은 뉘슈?”
할아버지는 한참을 나를 바라보셨고, 차오르는 눈물을 숨기며 할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는 손에든 마늘 한 알을 손에 쥐어 주셨다. 처음 뵙는다며, 온화한 얼굴로 웃어 보이셨다. 서둘러 아랫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유, 여일네 또 왔는감. 오늘은 뭘 들고 왔어?”
이 마을에선 아들, 딸의 이름이 주소였고, 이름이었고, 삶이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우리 할아버지의 이름이었고, 마을 어르신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하루에도 수차례 대문을 두드리는 할아버지를 좋지 않은 무릎으로 반갑게 맞아주셨다.
“손자인감?”
이미 할아버지는 다른 목적지로 향하셨다. 급하게 인사하는 나에게 아랫집 할머니는 달걀 두 알을 오늘 아침에 낳은 거라며 손에 쥐어주셨다. 방금 삶은 듯 따끈따끈했다. 작은 내 손에 가득히 온기가 전해져 왔다.
“여일 어멈-. 효재 할멈-. 어디 갔는가”
빈손이 된 할아버지는 가파른 언덕을 쉽게도 오르셨다. 그 걸음이 너무 가벼워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아 부지런히 움직였다. 어느덧 해는 지고 있었고, 대나무밭 사이로 할아버지가 계셨다. 따뜻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할아버지 품은 마늘 냄새와 흙냄새, 나물 냄새가 났다. 할머니와 같은 냄새였다. 할아버지는 여느 때와 같으셨다. 꼿꼿한 허리에 눈부신 백발에 동백기름을 발라넘긴 포마드 머리.
“우리 손자 왔냐.”
우리 할아버지는 최고의 신사셨다.
할머니와 많은 얘길 했다.
뒷산에서 할아버지가 쑥 뜯어오던 얘기, 건넛집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할아버지가 그 집 개밥을 챙겨 주셨다는 얘기, 할아버지가 냉수마찰을 즐겨하셨던 얘기, 곶감을 바짝 말리면 딱딱해서 맛없다는데도 끝까지 딱딱하게 말렸다는 얘기, 무화과 잼을 잘 만드셨다는 얘기, 가방엔 철마다 나는 나물을 정갈하게 정리해 넣고 다니셨다는 얘기, 끝까지 효재 할멈이라고 불러줬다는 얘기, 지금은 조용해진 이곳을, 마을 사람들을 많이 사랑하셨다는 얘기…….
할아버지는 대나무처럼 사셨다. 봄에는 죽순처럼 여러 사람과 나눔을 즐기셨고,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처럼 기댈 수 있게 해주셨다. 가을에는 그 향에 취하게 하셨고, 겨울이면 그 푸름을 깊게 간직하셨다. 그리고 대나무 꽃을 피우셨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4-H를 시작하며 희미해졌던 소중한 추억들을 더듬어보게 되었다.
비록 학교 활동이었지만, 딸기를 가꾸고, 모내기를 도우며, 대추나무를 가꾸고, 고구마를 캐면서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그 계절들을 추억 할 수 있었다. 몸이 상한다며, 이제 쉬시라 핀잔주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거부하시며 할아버지가 농사를 계속 이어가셨던 이유, 마을 사람들과 서로 도와 가는 그 삶 자체가 이유였음을….
교내 4-H활동으로 국화를 관리했다. 그 작은 생명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며, 씨앗에서 새싹으로, 새싹에서 우리들처럼 성장통을 겪듯 비바람에 이겨내는 힘을 직접 느꼈다. 가을이 되어 꽃봉오리가 올라오고, 터지는 순간을 바라보며 그동안의 보람을 느꼈다.
무엇인가를 기르고, 수확하는 것. 어쩌면 농부란 대단한 직업이지만 우리에게 멀기만 한 직업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작은 화단, 혹은 나무 한그루를 가꾸더라도 그 의미를 가지고 정성을 가진 다면, 작은 농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웃과의 나눔 또한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그 마음이 전해지면 소중한 인연이 쌓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4-H를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은 큰 일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작은 일 하나, 둘, 나름대로 멋진 일이진 않을까. 나는 4-H 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꿈을 꾸곤 한다. 할아버지의 마늘 한 톨을, 아랫집 할머니의 따뜻한 달걀 두 알을, 계속해 이어가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