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지 않던 것을 의심하는 것, 그것이 발전이다
於不疑處有疑 方是進矣(어불의처유의 방시진의)
- 《장자전서(張子全書)》 중에서"
암기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달달 외우는 것은 참으로 번거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남자들 사이에서 ‘끔찍한 경험’ 중에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 바로 군대 경험인데, 필자의 경우 군대에 들어가 가장 먼저 맞닥뜨린 어려움이 ‘외우는 것’이었다.
군번과 총기번호를 시작으로 직속상관 관등성명, 군가, 여기에 더해 다양한 매뉴얼들을 달달 외워야 했다.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이해도 하지 못하면서 일단 무조건 외워야 했다.
그런데 그 끔찍한 암기의 과정을 거쳐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입으로 줄줄 외우게 됐던 많은 내용들 중에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일까.
기억에 남는 것과 기억에 남지 않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급하게 집을 나서다가 지갑을 집에 놓고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지갑을 챙겨 나왔다. 그런데 한참 길을 가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 ‘내가 문을 잠그고 나왔던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슷한 경우는 참으로 많다. 가스 밸브를 잠갔는지, 화장실 물을 내렸는지, 수도꼭지를 잠갔는지…. 나중에 확인해보면 모두 이상이 없다. 분명히 내 몸을 움직여 수행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핵심은 마음이다. 손으로는 밸브를 잠그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입으로 달달 외웠더라도 시간이 흐른 후 까맣게 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중국 송나라의 학자 장재(張載 ; 1020~1077)는 특별한 스승 없이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병법(兵法)을 공부하여 장수가 되려고 하다가 마음을 바꿔 ‘중용(中庸)’ 등 유교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시 불교와 노장(老莊) 사상에 빠져들었고 그 끝머리에 ‘역경(易經)’을 새롭게 이해하면서 다시 유학(儒學)으로 돌아와 일가를 이루었다.
한마디로 좌충우돌의 학문적 여정을 겪은 주인공이다.
그렇기에 그의 공부는 매우 깊고 광범위하며 정밀하다. 따로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온갖 책을 스승으로 삼아 스스로 터득한 학자였다.
그러니 그의 공부법은 후배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그가 강조한 것이 바로 달달 외우는 암기였다. 장재의 말을 들어보자.
“좋은 글을 읽으면 반드시 암기해야 한다(書須成誦). 암기하라는 뜻은 억지로 입으로만 달달 외우라는 뜻이 아니다.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저절로 암기할 수 있게 되며, 그러한 과정 속에 정밀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깨달음을 얻으면 억지로 암기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머릿속에 그 문장이 나타난다. 책을 읽을 때마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계속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며, 이전에 읽었던 책이라 하더라도 계속 생각하며 의심해보아야 한다. 의심해보는 가운데 새로운 깨달음이 생긴다. 의심하지 않던 것을 의심하는 것, 그것이 발전이다(於不疑處有疑 方是進矣).”
방점은 어디에 찍혀 있는가. 의심한다는 뜻을 지닌 ‘의(疑)’에 찍혀 있다.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에는 이해가 없다. 끊임없이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가운데 외우게 되고 그렇게 몸과 마음에 젖어들어 이해가 깊어진다.
타인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나 자신을, 나의 이해가 정확한지에 대해 의심하라는 뜻이다.
모 유명작가의 표절논란이 시끄럽다. 외우기만 하고 의심하지 않은 결과가 아닐까.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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