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아라
當以己心爲嚴師(당이기심위엄사)
- 《근사록(近思錄)》 중에서"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에 대해 ‘사람은 본래 착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조금 부족해 보인다. 맹자가 말한 성선설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을 지니고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우주의 질서를 몸에 지니고 태어났다고 이해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우주의 질서가 바로 ‘선(善)’이다.
유학(儒學)에서 말하는 ‘선(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선악(善惡)의 상대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것은 착하거나 착하지 않거나, 악하거나 악하지 않다는 구분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
태어나고 죽는 모든 과정이 마치 별 하나가 탄생했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우주의 질서 속에 존재한다는 성찰과 함께 한다.
송나라의 학자 ‘정호(程顥)’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아주 순수한 물을 생각해보라. 처음 순수한 물 한 방울은 매우 깨끗하다. 그러나 여러 물방울이 모여 아래로 흘러가기 시작하면 조금씩 달라진다. 바다에 이르기까지 계속 깨끗함을 유지하는 물도 있겠지만 매우 드물 것이다. 이러한 물을 사람에 비유한다면 그것이 ‘성인(聖人)’이다.
멀리 흘러가지도 않았는데 금방 더러워지는 물도 있고 멀리 흘러가서야 비로소 더러워지는 물도 있다. 그 더러움의 정도도 모두 다르다. 그러나 탁하고 맑음에 차이가 있더라도 모두 물인 것은 분명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처음의 맑음을 유지하기 위해 항상 성실하게 노력해야 한다. 머뭇거리지 않고 진실하고 성실하게 힘써 노력하면 빠르게 깨끗해질 것이고, 성실하지 못하고 게으르면 한참이 지나야 깨끗해질 것이다. 더러움을 이겨내고 깨끗한 상태가 되면 최초의 물처럼 맑게 변할 것이다.
이것은 더러운 물을 버리고 깨끗한 물로 바꾼 게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더러움과 깨끗함, 선과 악은 둘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의 상태로 있는 것이며, 변화를 통해 바뀔 뿐이다. 이러한 이치가 바로 하늘의 이치이며 자연의 이치다.
이것을 따르는 것이 ‘도(道)’다. ‘도(道)’를 잘 따르도록 돕는 게 교육이다. 이 모든 과정은 사람이 정한 것이 아니기에 무엇을 더 더하거나 뺄 수도 없다.”
더러운 물과 깨끗한 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따로 없다는 뜻이다. 잡다한 게 섞여 더러워지면 깨끗하게 정화하면 된다. 얼굴이 더러워지면 세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걸 곁에서 도와주는 게 교육이며 스승이다. 세수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물이나 비누가 아니라 내 손이다. 나 자신이다. 물과 비누가 있어도 내가 씻지 않으면 모두가 무용지물이다. 결국 스승은 조력자일 뿐 주체가 아니다.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나 자신이다. 훌륭한 스승이 훌륭한 제자를 길러내는 게 아니다. 훌륭한 제자가 훌륭한 스승을 만들어낸다.
특별한 스승 밑에서 배우지 않고 독학으로 높은 학문을 이룩한 송나라의 학자 ‘장재(張載)’는 “스스로 내 마음을 엄한 스승으로 삼아라(當以己心爲嚴師). 게으름에 빠지려고 하면 스스로 강하게 꾸중하며 깨우쳐주어라. 다른 사람은 잠시 속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엄한 스승이 되어 마음을 바로잡으면 큰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렇게 1~2년 굳세게 나아가면 반드시 바른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탄할 필요는 없다. 내가 훌륭해지면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훌륭한 스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럴 때 고난도 스승이 되며 산과 바다도 스승이 된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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