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15 격주간 제803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배은망덕(背恩忘德)을 말하기 전에…

"적은 것을 준 후에 많은 것을 바라지 말라
薄施厚望者不報(박시후망자부보)
- 《명심보감(明心寶鑑)》 중에서"


“내가 그렇게까지 당신을 도와주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나에게….” 주변에서 흔히 듣는 말이다. 아니 내가 직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을 법도 하다. 그래서 생긴 말이 ‘배은망덕(背恩忘德)’이다.
은혜를 입었으면 잊지 말고 고맙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며 사람들은 한탄한다. 사람에게 은혜를 입은 짐승들이 시간이 흐른 후 은혜를 보답한다는 전설과 민담이 많은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물며 짐승도 은혜를 갚는데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냐’는 뜻으로 만든 이야기일 것이니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시각을 조금 달리하여 살펴볼 필요도 있다.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입는 것은 채무관계인가.
“아주 작은 은혜를 베풀면서도 큰 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보답을 받지 못한다(薄施厚望者不報).”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등장하는 이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자. 왜 은혜를 받고 그것을 잊은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은혜를 베푼 사람에게 화살을 겨누는 것일까. 작은 은혜라도 베풀었다면 그 사람은 그나마 아무 것도 베풀지 않은 사람보다 나은 것 아닌가. 맞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파악해야 한다. 은혜를 베푸는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일이 아니라 일방적인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은혜를 베푼다’는 것에 상대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주체인 ‘나’만 있을 뿐이다.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은혜를 베푸는 것은 상대를 구별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행위일 뿐이다. 거래관계라면 상대가 중요하지만 거래관계가 아니라면 나 혼자만 존재한다. 내가 결정한 일에 상대방을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비겁한 일이다.
또한 주는 사람은 많은 것을 어렵게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받는 사람의 입장은 적은 것을 쉽게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주관적 견해이기 때문이다. 받은 사람은 ‘줄만한 입장이니 주었겠지’라고 생각한다. 남의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남의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대부분 이러하다. 준 사람은 다르다. 내 것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 것을 바라보는 시선과 남의 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처럼 다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오는 위 문장의 본래 출처는 ‘소서(素書)’다. ‘소서(素書)’는 중국 진(秦)나라 말에 살았던 병법가 ‘황석공(黃石公)’이 지은 책이다.
황석공은 장양(張良)에게 병서(兵書)를 전해 주었다는 노인으로, 장양은 이 병서를 읽고서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 통일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소서(素書)’는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는 뜬구름 잡는 경전이 아니라는 뜻이다. 철저하게 현실세계의 유불리를 논한 책이다.
결국 “주었다면 잊어라.”는 조언은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조언이다. 현실과 조응하는 이상, 실제 삶과 함께 호흡하는 이상, 유학(儒學)은 그렇기에 현실감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애초에 주지 말아야 한다. 아니면 계약서를 쓰고 줘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잊어야 한다.
은혜를 갚은 짐승들 이야기를 잘 살펴보라. 은혜를 베푼 사람이 조금이라도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머리에 떠올린 적이 있었는지. 베풀었다는 사실 자체에 매달리면 그에 대한 보답도 없다.
각박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아니다. 세상의 모든 이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잊는다고 생각해보라. 세상 모든 이들은 은혜를 받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인가.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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