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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물관 연못 정자에 앉아 선물 같은 세상을 바라봤다. |
오래 전에 이탈리아 폼페이를 여행한 적이 있었다. 이천 년 전의 고대 도시가 화산재에 1500년간 묻혀 있다가 어느 농부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폼페이. 그곳에서 화석으로 굳어 있는 고대인들을 보았다. 폐허가 된 거리를 걸으며 나는 삶과 죽음을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가 죽음을 외면하려 하는 것은 남겨질 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일 것이다. 나는 폼페이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배웠다.
그때의 기억을 더듬으며 마침 폼페이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 입구로 들어서니 여인의 조각상과 분수가 있는 정원이 보였다. 현대의 가장 화려한 주택과 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거대한 벽화 속엔 새와 나무와 꽃들이 그려져 있었다. 고대 어느 화가의 숨결이 묻어 있는 벽화 앞에서 나는 재재거리는 새소리를 들었다. 한치 앞을 모른 채 살아가는 우리처럼.
다음 섹션은 아름다움의 추구였다. 고대 여인들도 아름다워지기 위해 팔찌, 귀걸이, 목걸이를 했다. 번쩍거리는 금을 보노라니 친구가 생각났다. 돌아가신 엄마 집 청소를 하는데 금덩어리 네 개가 나왔단다. 형제가 하나씩 나누어 가졌는데 가슴이 먹먹해 잠이 안 온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바느질을 하던 그녀의 엄마는 김치나 고추장 하나로 밥을 먹었단다. 그런 엄마를 불평만 했던 친구는 금덩어리를 안고 울었단다. 여기 전시된 금장식들도 저마다 아픈 사연이 있을 것이다.
다음 전시실에서 폼페이의 화폐인 금화, 은화, 동화를 보았다. 폼페이는 항구도시로 상업이 발달해 술집, 패스트푸드점이 즐비했다고 한다. 수돗물이 솟아오르고 공중목욕탕엔 체육관과 마사지실이 있었다. 또한 거대한 원형경기장은 현대의 스타디움을 무색하게 했다. 담석 제거, 백내장 수술도 가능했고 의술도 세분화 되어 있었다. 장례식엔 화장을 해 유골함에 넣었다고 한다. 인류 역사상 그들이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고대’하면 미개인이나 자급자족을 떠올리던 내가 우스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폼페이는 매음굴을 인정했고 법적으로 포도주 한 잔 값이면 이용할 수 있었다. 삼분의 일이 노예였던 그 시대, 노예는 사람이 아니고 소모품이었다. 부자들은 화려한 집과 보석들을 남기고, 폼페이의 창녀들이 남긴 건 노골적인 성적 벽화뿐. 그때도 양극화와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했던 것이다.
마지막 섹션이 최후의 날이다. 기원후 79년 8월 24일 단 하루 만에 폼페이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과정을 보여주는 동영상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천지가 무너지는 소리, 개 짖는 소리, 아이들 울부짖는 소리, 그리고 이천 년 동안 화석이 된 사람과 동물이 거기 있었다. 누웠거나 앉았거나 모두 고통에 사지를 비틀고 있었다. 순리대로 죽는 죽음은 얼마나 행복한가?
나는 그곳에서 출구로 나가지 않았다. 죽음에 등을 돌리고 필름을 거꾸로 돌리듯 햇볕 아래로 걸어 나왔다. 나는 박물관 연못 정자에 앉아 선물 같은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시실에서 본 구절을 떠올렸다.
‘몸을 쉬고 건강한 꿈을 꾸고, 꾸밈이나 기교 없이 좀 더 아름다운 것을 즐기기에 이 보다 훌륭한 장소가 어디 있을까?’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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