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2-01 격주간 제798호>
[4-H강단] 글로벌4-H네트워크 : 공유된 비전 ①

“우리의 비전은 청소년이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주는 것”

돈플로이드(Donald T Floyd Jr) 회장 (글로벌 클로버 네트워크)

4T, 4K, 4S, 4B, 4C, 4A, 4F, 4H, Rural Youth, Young Farmers….
세계 각국의 언어로 우리는 클럽, 공동체, 나라, 세계에 우리의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s), 건강(Health)으로 헌신한다고 맹세한다.
우리 프로그램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우리는 비슷하게 생기지도, 비슷하게 들리지도, 비슷한 조직형태를 가지지도, 같은 로고를 사용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개별 국가와 조직으로서 독립적이며, 대부분은 정부보다 공동체에 의해 더 많은 통제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는 청소년이 각 나라의 가장 소중한 자원이라는 공통 견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4-H활동을 통해 청소년들이 자원지도자의 보살핌 아래 생활기술(Life Skill)을 배우고, 리더십을 함양해 사회에 기여하는 성숙한 시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4-H역사상 처음으로, 여러 대륙, 국가, 지역을 넘어 하나의 운동으로서, 대한민국 서울에 함께 모였다. 우리가 함께함으로써 복잡한 세상에서 4-H의 영향력은 더욱 증대될 것이다.
우리의 비전은 글로벌4-H네트워크를 통해 청소년이 스스로의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그들의 잠재력을 발휘할 때 복잡한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오늘이 오기까지는 미국 아이오와주와 오하이오주의 옥수수 밭에서 시작한 아주 작은 생각이 시발점이 됐다. 4-H에 대한 아이디어는 아이오와에 사는 젊은 선생님과 60대 교육장으로부터 동시에 시작됐다. 지난 112년 동안 번성한 제스 샴보(Jesse field Shambaugh)와 그래함(AB Graham)이 꿈꾸었던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을까?
청소년에게 혁신적인 농업기술을 교육시킨 것이 어떻게 강력한 청소년육성조직을 탄생시킨 모티브가 되었을까? 옥수수클럽을 이용하던 농업대학이 보수적인 농업인들에게 새로운 변종씨앗을 사용토록하기 위해 16살인 농업인의 아들들에게 이 새로운 씨앗을 주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55개국 이상의 700만 청소년을 가진 조직으로 발전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1910년, 버지니아주에 사는 한 청소년은 국가 평균 옥수수 산출량이 1에이커(4ha) 당 1224kg일 때 1에이커에서 옥수수 5800kg을 수확했다. 이와 같이 획기적인 농업기술의 전이가 각 국가에서 이루어진 것이 4-H가 급속한 성장을 이룬 이유 중 하나였다.
4-H의 시작과 관련된 1902년 미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는 계속 반복되는 흥미로운 패턴을 볼 수 있다. 곳곳에 청소년이 매우 빨리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믿는 기성세대들이 있었으며, 각성한 정부의 청소년에 대한 보살핌이 있었고, 정부가 4-H의 성장에 도움을 주었다. 4-H의 빠른 성장을 지원하는 효과적인 농촌지도사업(Extension) 프로그램을 가진 국가들이 있었으며, 국가가 4-H초창기 성장을 위한 최고의 지원자가 되었고, 공공부문과 민간부문이 함께 4-H성장의 파트너가 됐다. 그리고 핵심 교육원칙은 실천으로 배우는 것(Learning by Doing)이었다.
식량안보, 농업 및 농촌 활력 등 농촌경제 문제와 관련된 이런 이슈들에 4-H는 매우 특별하게 잘 대처했다. 또한 프로그램이 성숙하면서, 성공적인 4-H프로그램이 긍정청소년개발의 ‘빅 3 (1. 청소년과 성인지도자간의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유대감 형성 / 2. 생활기술(Life Sill) 학습 / 3. 리더십의 실천)’라는 과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농업적 뿌리를 넘어 다양한 프로그램을 채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필자가 세계를 다니며 관찰하고, 4-H프로그램에 대해 배운 내용이다.
글로벌4-H프로그램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다행히 톰과 마릴린 베셀이 이에 관한 책 ‘4-H : 미국의 아이디어, 4-H역사’를 기술했고, 이 덕분에 우리는 4-H역사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됐다.
1973년, 미국 4-H서약에 ‘세계를 위해’라는 문구가 추가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지구촌에 살고 있으며, 4-H가 지구촌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재미있게도 이 ‘세계를 위해’라는 문구의 추가를 건의한 것이 6세의 어린 4-H회원이었는데, 당시 집행부의 어른들은 이 제안에 반대했고 변화를 용인하지 않았다.
이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을 수 있다. 우리 중 많은 기성세대가 변화를 거부한다. “시도해 봤다.”, “늘 이렇게 해왔다.” 이것이 예전에 해오던 방식의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의 운동을 성장시키기 위해 112년의 혁신, 청소년 파트너십, 고품질의 배움을 공유하는 것일까? 이해와 통찰을 위해 우리의 역사를 계속 살펴보고자 한다.
1920년대에는 4-H유형의 프로그램이 영국, 캐나다, 라트비아에 있다. 캐나다의 4-H프로그램은 1913년에 설립됐고, 북미 이외 지역에서 처음 설립된 4-H조직은 1928년의 핀란드였다. 4-H는 2차 세계대전 말까지 서서히 성장했다. 2차 세계대전 후 재건 노력의 일환으로 4-H는 유럽과 아시아 일부지역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미 주둔군의 많은 수가 4-H출신자였고, 많은 4-H클럽은 전쟁으로 파괴된 국가들의 재건 필요성을 목격한 미군들에 의해 조직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정부의 공식 재건 프로그램에는 4-H클럽이 빈번히 포함됐다. 1940~50년대 미국에서 4-H클럽은 번성한 조직이었고, 유럽에 4-H클럽을 전파했고, 재건국가의 신생 4-H클럽에 가축이나 씨앗을 보급했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혁신적인 4-H프로그램 중 하나는 바로 대한민국이다. 2차 세계대전 말, 경기도 군정관인 찰스 앤드슨 대령과 구자옥 경기도지사는 경기도에 4-H조직여부를 투표에 부쳤고, 유권자 대부분이 4-H설립을 지지했다. 4-H는 한국전쟁 이후 한국발전의 불가결한 한 부분이 되었다. 4-H클럽과 새마을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적 발전 및 현재 누리고 있는 번영의 초석임이 폭넓게 인식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는 1950년 말까지 일본의 4-H가 빠르게 성장했는데, 1만3000개의 4-H클럽과 25만명의 회원이 활동했다. 농촌개발 프로그램이 핵심이었고, 일본의 식량생산 능력의 회복을 도왔다.
카리브해 섬은 1930년대에 4-H운동을 시작했고 섬 전체 지역으로 확장됐다. 매우 큰 규모의 4-H프로그램이 쿠바와 자메이카에서 생겨났다. 오늘날 자메이카는 70년 이상 지속된 4-H프로그램의 탁월함을 축하하고 있으며, 올해 4-H클럽 가입자가 8만7000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라틴아메리카의 4-H에 대한 관심은 카리브해 자치구프로그램에 방문과 관심에 의해 자극됐다. 캘러그 재단과 같은 미국의 대형 재단들은 지역 경제 발전의 파트너가 됐다. 주목할 것은 평화봉사단과 피플투피플 같은 미국 정부 프로그램이 라틴아메리카4-H의 급속한 성장을 촉진한 것이다. 가장 의미 있는 파트너십은 4-H가 평화봉사단 지원자를 채용하고 교육시켜달라는 브라질의 요청을 받았을 때다. 50년 전에 그 자원자들은 브라질에서 수백 개의 4-H클럽을 조직했다. 〈계속〉
※이 글은 제1회 글로벌4-H네트워크 세계대회 국제회의 기조강연 원고로 3회에 걸쳐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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