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2-15 격주간 제795호>
[이 달의 착한나들이] 선정릉, 타임캡슐 속으로
나는 두 손으로 언 꽃잎을 감싸주었다. “이 겨울에 누굴 찾아 여기에 왔니?”

첫눈이 하얗게 내린 날 오래된 연인을 만나듯 선정릉으로 갔다. 선정릉은 오백년 전의 타임캡슐이다. 서울에서 제일 번화한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푸른 녹지대. 오래된 나무들이 눈에 덮여 있는 선정릉에 들어서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성종과 정현왕후, 아들 중종 무덤이 있는 숲길을 걸으니 구불구불한 고개 너머로 새색시 태운 꽃가마가 보이는 듯도 했다.
나는 조선 9대 왕 성종 무덤 옆에 섰다. 무덤은 역사를 말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병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관마저 불태워진 성종. 성종은 투기가 심해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겼다는 이유로 연산군을 낳은 윤 씨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 때에 비해 세상은 얼마나 많이 변했는가? 대통령이 여성이고 요즘은 사위들이 처갓집에 가서 김장을 하는 시대가 되었으니. 
선정릉의 새소리는 유난하다. 새들의 소리는 시냇물 위에 부서지는 햇살처럼 내 안에서 반짝인다. 반짝이며 나의 찌든 하루를 헹구어 준다. 오늘 하루 노래할 수 있다면 바랄 게 없다고 재재거리는 새소리 사이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걸음을 빨리하는 내 눈 속으로 무언가 급히 뛰어 들었다. 길가에 핀 노란 개나리! 다가가보니 어린 꽃잎이 얼어 있었다. 나는 꽃잎을 두 손으로 감싸주었다. 이 겨울에 누굴 찾아 여기에 왔니?
아침에 읽은 몽골 자매에 관한 기사가 생각났다. 둘이는 이웃집에 만두 빚으러 간 엄마를 찾아 집을 나섰다가 밤새도록 눈길을 헤매게 된 것이다. 아침에 아이들을 찾았을 때 8살 언니는 6살 동생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 입히고 자기는 속옷 바람으로 동생을 꼭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동생은 심한 동상에 걸렸지만 목숨을 건졌고 언니만 찾는다고 했다.
눈 오는 날 찾아간 선정릉에서 나는 조상들이 물려준 숲길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마시고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힘을 얻고 눈 속에 핀 개나리를 만나 체온을 나누었다. 눈발은 점점 더 세어지고 나는 선정릉이라는 타임캡슐 밖으로 나와 빽빽한 빌딩숲을 지나 지하철을 탔다.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도 언젠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남겨줄 것인가? 
현재 남산골 한옥마을엔 400년 후에 후손들이 개봉할 타임캡슐이 있다. 서울 정도(定都) 천년을 기념해서 만든 그 안엔 유산 600여 점이 들어 있다. 기저귀, 팬티스타킹, 부동산매매계약서, 피임기구, 인공심장, 상품권, 그리고 에이즈 실태, 시험관 아기, 금융실명제, 증권 깡통계좌, 남대문시장, 백화점, 복덕방, 대통령 하루일정, 노래방 등이 CD 영상으로 들어 있다.
우리가 물려받은 선정릉은 세계문화유산이다. 도심 속에 수백 년 동안 숲을 보존한 경이로움 때문에 선정되었다고 한다. 또한 CNN에서 뽑은 한국의 아름다운 장소 중 하나다. 자연은 어머니처럼 지친 우리들을 살린다. 맑은 물과 공기를 간직한 자연과 혹한의 눈보라 속에서 동생에게 옷을 벗어주는 사랑 또한 우리가 보존하고 물려주어야 할 유산이 아닌가. 오늘날 자본주의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극도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줄 600가지 유산 속에 빠진 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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