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0-15 격주간 제791호>
[이 달의 착한나들이] 앨범 속으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살기를 원한다.

요즘 풍수지리에 관한 책을 읽는데 가장 중요한 건 청결이라고 한다.
거실이나 방은 물론이고 특히, 현관은 복이 들어오는 입구라 정리를 잘해야 한단다. 사람이나 복이나 더러운 거 싫어하는 건 비슷한가보다.
청소하면 기분 좋고 복까지 들어온다는데 맘먹고 오랜만에 청소를 시작했다. 그 바람에 책장 구석에 쌓아둔 앨범을 뒤적이는데 낡고 희미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첫 직장인 냉동 회사에서 무슨 날이었는지 직원들이랑 찍은 사진이었다. 그 속에 키가 크고 대머리가 훌렁 벗겨진 남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아! 서 계장님!
기억이란 낚시와 같다. 흔들리는 수면을 가만히 응시하노라면 때론 생생하게 파닥이며 건져 올려지는 물고기처럼 그 남자는 내 기억 밖으로 튀어 올랐다. 유별나게 큰 웃음소리와 장난기 많던 사람.
그날은 직원이 다 모이는 첫 번째 회식자리였다. 중국요리를 먹으며 모두에게 술을 한잔씩 돌렸다. 그건 빼갈이었다.
난 그게 독한 술인지 몰랐다. 마셔본 적이 없었으므로. 내가 망설이자 서 계장이 이제 성인이니 마셔도 된다고 맥주보다 맛있다고 눈을 끔뻑였다.
그래서 건배를 하고 단숨에 꿀꺽 삼켜버린 순간 목에서 활활 불이 났다. 나는 숨도 못 쉬고 캑캑거리며 한동안 눈물 콧물을 흘렸다는데 그걸 본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했다.
난 다음 날부터 회사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김 계장이 집으로 와서 아버지에게 사과했지만 아버지는 말했다.
면장도 제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그는 나를 만나려했지만 끝내 만나주지 않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내 기억 속에서 시뻘건 얼굴로 웃어대던 능글맞은 그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철없이 막을 내린 첫 번째 직장 생활이었다. 사과할 기회도 주지 않고 증오하며 내 기분대로 그를 평가하고 이제껏 기억 속에 방치해온 사람.
지금 앨범 속에 그를 자세히 바라보니 그는 끔찍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외롭고 고독한 그저 평범한 샐러리맨일 뿐.
갓 입사한 귀여운 막내둥이인 내게 잠시 장난기가 발동한 것이지 누가 직장까지지 그만두길 바랐겠는가. 그 일로 그도 회사에서 곤란을 당했을 테고 오랜 시간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세월이 약이다. 세월 흐르니 남이 보인다. 지금 만난다면 빼갈 아니라 빼갈할아버지라도 한잔하자며 화해의 손을 내밀고 환하게 웃어주고 싶다.
아득한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풍수지리 책을 읽고 복 받으려고 청소하다 앨범 속에서 만난 그 사람. 복이란 이런 건지도 모른다.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듯 자신을 돌아보고 한 사람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게 된 것.
괴테는 말했다. 자기가 얼마나 자주 타인을 오해하는가를 자각한다면 남들 앞에서 함부로 말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정겹고 애틋하게 앨범을 넘기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앨범의 사진들이 막다른 골목처럼 오래 전에 끝나 있는 것을.
홍수처럼 찍어대는 사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핸드폰 속 사진이 사라지기 전 앨범으로 데려와야겠다. 내가 오늘 받은 복은 앨범 덕분이니.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살기를 원한다. 수없이 스쳐 지나간 사람들에게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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