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가는구나, 멈추지 않는구나!
逝者如斯夫 不舍晝夜(서자여사부 불사주야)
- 《논어(論語)》 중에서"
유교(儒敎)인가 유학(儒學)인가. ‘그게 그거’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요즘의 눈높이로 정밀하게 따져볼 필요도 있겠다. 언어란 그 시대의 이해와 함께 호흡해야 하는 것이니 단어에 대한 개념의 정립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공자도 ‘내가 정치를 하게 되면 가장 먼저 정명(正名)부터 하겠다.’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정명(正名)이 무엇인가. 단어의 개념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자. 툭하면 ‘나라와 국민이 원한다면…’이라고 서두를 꺼내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사람마다 그 개념이 충돌하기도 한다. 같은 말을 하는데 지향하는 지점은 확연히 다르다. 정명(正名)이 필요한 이유다.
유교(儒敎) 혹은 유학(儒學)이라는 단어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글자는 ‘유(儒)’다. ‘유(儒)’는 선비를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학자 정도가 될 것이다. 교수님도 아니고 연구원도 아니다. 박사님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학자는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이다. 올바른 삶이 무엇인지, 나는 누구이고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 공부하는 방법에 있어 공자와 맹자의 계통을 따르던 사람들을 통칭 ‘유가(儒家)’라 불렀고 그들이 하는 학문을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라 부른것이다.
그렇다면 ‘교(敎)’와 ‘학(學)’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교(敎)’는 ‘가르침[teach]’의 개념을, ‘학(學)’은 ‘배움[study]’의 개념을 지닌다. ‘가르침’과 ‘배움’은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에 원래는 붙어있는 개념이었다.
그렇다면 공자는 누구에게 배웠는가. 공자의 스승은 누구인가.
“공자가 시냇가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보며 말했다. ‘거침없이 가는구나, 멈추지 않는구나!’(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이다. 이것을 보면 시냇물이 공자의 스승이다. 공자가 그런 말을 하자 제자가 곁에서 그것을 듣고 메모했다가 ‘논어(論語)’를 엮을 때 포함시켰다. 공자가 시냇물에게 배운 것을 공자의 제자들은 공자의 언어로 배운다. 시냇물은 ‘교(敎)’고 공자의 배움은 ‘학(學)’이며 공자의 말은 다시 ‘교(敎)’다.
그런데 시냇물은 생각하지 않고 공자의 말에만 얽매이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그런 경우를 ‘교조주의(dogmatism, 敎條主義)’라고 부른다.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공자라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이제 공자의 스승과 직접 대면해야 한다.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시냇물을 보며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던 것일까. 후대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나름대로 이런저런 해석을 내리곤 했다. 세월의 무상함을 말한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의미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물에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 저 멀리에 있는 근원(처음 샘물이 솟아난 자리)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 해석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일까?
‘논어(論語)’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실마리로 삼아 공부를 해보자.
“공자가 자공(子貢)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아는 것이 많아서, 그 모든 것을 다 기억했다가 말해주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자공이 대답했다.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틀렸다. 나는 하나의 이치로 모든 사물을 연결시킬 뿐이다.(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연결시킨다고? 희미하지만 공자의 스승이 가진 그림자가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이제부터 공자의 스승이 누구인지 찾아가보자.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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