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9-15 격주간 제789호>
[이 달의 착한나들이] 600년 전의 남자를 만나다
나는 그루터기에 앉아 눈을 감았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참 많은 영웅들의 목숨이 이 소나무처럼 잘려나갔다.

요즘 나를 사로잡은 사람은 책이나 드라마로 재조명 되고 있는 정도전이다. 철학과 역사, 과학과 예술을 넘나들며 수많은 저서와 시를 남기고 조선의 기틀을 마련한 600년 전의 한 남자.
그를 만나러 평택에 있는 그의 사당으로 갔다. 진위역에 내려 시골버스를 타려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 그래서 둘러보니 다리가 아프신 듯 할아버지가 쭈그리고 앉아 계셨다. 나는 다가가서 정도전 사당에 가려는데 여기서 버스를 타는지 여쭈었다. 알고 보니 할아버지는 정도전의 19대 후손으로 마을에서 제일 나이 드신 어른이셨다. 살아있는 정도전을 만난 기분으로 그 어른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오래된 역사처럼 길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노인. 과거는 흘러가고 현실은 늘 초라한 것인가? 나는 버스에서 내리며 할아버지께 손을 흔들었다.
사당엔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고 안내인 전화번호가 사당 문에 붙어있었다. 그 옆엔 생뚱맞게 빨간 보안업체의 마크와 CCTV도 붙어 있었다. 정도전이 보면 뭐라고 할지…. 나도 몰래 웃음이 났다. 안내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아파서 병원이라고 했다. 피할 수 없는 건 즐기랬다고 나는 사당 처마 밑에 앉아 김밥을 먹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변함없는 진리는 먹어야 산다는 것. 정도전도 말했다. “나라에겐 백성이 하늘이고 백성에겐 밥이 하늘이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당은 고요했다. 오랜만에 친정에라도 온 듯 사당을 한 바퀴 돌고 휘적휘적 사당 뒤편 낮은 언덕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잘려져 나간 굵은 소나무 그루터기가 있었다. 나는 그루터기에 앉아 눈을 감았다. 고려 말 조선 초에는 참 많은 영웅들의 목숨이 이 소나무처럼 잘려나갔다.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한 최영, 천재에 덕망까지 갖춘 정몽주, 민본정치로 백성들을 구하려 했던 혁명가 정도전. 그들은 하나같이 신념을 위해 목숨을 버렸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그들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정몽주는 고려충신으로 영원히 살고 정도전은 조선을 세우는 꿈을 이루었으니.
그들에 비하면 나의 꿈은 참으로 작고 부끄럽다. 요즘은 친구들을 만나면 모두 치매를 두려워한다. 치매나 안 걸리고 건강하게 살다 죽는 것이 우리의 꿈이 된 것이다. 그래서 늘 무엇을 먹을까 무슨 운동을 할까 전전긍긍이다. 아이들도 그걸 보고 배우니 신념이란 게 별로 있을 수 없다.
어디선가 매미소리가 들려왔다. 7년을 땅속에서 기다려 7일을 살고 간다는 매미. 왠지 정도전을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스 시간에 맞추어야하기 때문. 버스를 타니 올 때 데려다 준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를 반긴다. 시골버스는 정겹다. 아저씨는 동네사람들을 다 아는지 일일이 인사를 했다. 도복을 입은 아이들이 ‘태권!’ 소리치며 타기도 하고, 어떤 아줌마는 음료수를 아저씨 손에 쥐어준다. 아저씨는 갑자기 흥겹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날의 꿈이었지. 오륙도 돌아가는 저 물결들도….’ 우리가 사는 세상 거친 바다 같아도 이만하면 살만하다. 징병에 끌려가고 노비로 팔리던 세상에 비하면. 그래도 먹고 살만하니 치매 걱정도 하고 노래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 나는 오늘도 누군가의 목숨으로 산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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