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산처럼, 때로는 물처럼
知者樂水 仁者樂山(지자요수 인자요산)
- 《논어(論語)》 중에서"
우리의 삶은 항상 변화한다.
아침에는 밝게 빛나고 저녁이면 캄캄해진다. 바람이 불다가 비가 오기도 하고 해가 쨍쨍하여 무더운 날도 있다. 춥고 배고픈 때가 있는가 하면 풍요롭고 만족스러운 때도 있다.
이처럼 변화무쌍한 삶이기에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것인지 애매하고 모호할 때가 많다. 그래서 고전을 펼쳐보며 지혜를 얻으려고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여기에서 말하는 게 다르고 저기에서 말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다.
참는 사람에게 복이 온다고 하다가도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말라고 한다. 억지로 성공하려고 매달리지 말라고 하다가도 용맹스럽게 나아가라고 한다.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추어야 하는지 애매할 뿐이다.
시험문제를 푸는데 정답이 이것인지 저것인지 애매하면 어떻게 하는가. ‘에라,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며 아무 것이나 찍어버리는 게 인지상정이다. 흔히 ‘연필을 굴린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대충 결정한다.
‘올바른 길이 어디냐’라는 질문에 대해 한 마디로 답하기는 어렵지만, ‘올바르지 않는 길이 어디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조금 쉽다. ‘아무렇게나 하지 말라’가 그것이기 때문이다. 연필을 굴리는 일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엇이든 정성스럽게, 깊게 생각하고, 성실하게 하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정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자세를 갖추면 장차 정답을 찾을 확률을 높일 수 있다.
이것을 유학(儒學)에서는‘충(忠)’ 혹은 ‘시중(時中)’이라고 말한다.
충(忠)은 ‘가운데 중(中)’ 아래에 ‘마음 심(心)’이 있다. 마음에 중심을 잡는다는 뜻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마음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적절한 때가 되면 자제하는 것, 아무리 싫어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필요한 때가 되면 흔쾌히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라에 충성(忠誠)’과는 사뭇 다른 뜻임을 알아야 한다. ‘충성(忠誠)’이란 충(忠)을 정성스럽게(誠) 이어간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시중(時中)은 때를 나타내는 ‘시(時)’와 ‘가운데 중(中)’이 만난 모습이다. 때에 따라 적절히 충(忠)을 유지하라는 뜻이다.
누군가 슬픔을 당했다면 함께 울어주고 누군가 기쁜 일을 맞이했다면 같이 기뻐해준다. 올바른 사람은 존중해주고 존경하며 따르고, 망나니 같은 사람이라면 곁에서 따끔하게 충고해 준다. 끝내 말을 듣지 않으면 멀리 한다.
산과 바다로 피서를 떠나는 요즘이니 공자의 말 중에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을 살펴보자. 흔히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고 풀이한다.
이 문장을 두고 토론을 벌이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넌 산이 좋아? 아니면 물이 좋아?’, ‘지혜로운 사람이 더 나은 거야? 아니면 어진 사람이 더 나은 거야?’
공자가 말한 전체 문장은 이러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 활동적이며 즐겁게 산다.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조용하게 지내며 장수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
두 사람이 아니다. 한 사람이다. 상황에 맞게 적절히 할 뿐이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충(忠)과 시중(時中)을 구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활동할 때에는 힘차고 즐겁게, 깊게 생각할 때에는 조용히. 그렇게 적절히 하니 건강하고 즐겁게 장수한다. ‘지자요수 인자요산(知者樂水 仁者樂山)’, 때로는 산처럼, 때로는 물처럼….
올바른 길은 따로 있지 않다.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가는 길, 그 길을 올바르게 만들면 된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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