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풀이로 읽다가 대어(大漁)를 낚게 하는 고우영의 십팔사략
김 혜 정 지도교사 (신안 안좌고등학교4-H회)
기말고사가 끝난 후 야간 자율학습은 학생에게나 교사에게나 곤혹이다. 이미 학생들의 마음은 방학인 것이다. 요즘 고등학생들에게 방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독서를 강조하며 책 읽기를 유도하지만 학생들은 영화나 한편 봤으면 하는 신호를 보낸다. 미리 방학숙제를 하든지 책을 읽든지 엄포를 내가며 만든 야간 독서시간! 처음에는 구시렁거리더니만 어느새 학생들은 책의 깊은 향기 속에 빠져든다.
우리 학창시절의 만화는 불량기 있는 학생들의 전형이었다. 교편에 들어와서 한때, 그 시절을 살아 온 나에게 간혹 만화를 읽는 학생들에게서는 희망을 읽지 못한 때가 있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은 그마저도 아닌 책과 담을 쌓고 사는 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2학년, 꽤 박학하다는 어떤 녀석이 누런 갱지에 채색도 되어 있지 않은 문고판 만화책에 푹 빠져 있는 것이다. 요즘도 이런 책이 나오나 싶을 정도로 골동품 그 자체인 책, 선생님이 옆에 서 있는 것도 모른 채 ‘십팔사략(十八史略)’ 삼매경! 사실 창피한 일이었지만 이 십팔사략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나에게 그 책은 불온한 서적이었으며 압수거리였다.
그 녀석은 다른 학생들이 신간에만 관심을 둘 때 학교 도서관 깊숙한 곳을 뒤져가며 고전을 읽는 학생이었다. 그 학생 덕분에 낱알낱알 흩어져 돌아다니던 중국사를 한 줄에 쭉 이어 꿸 수 있었다.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대해서 소개해 본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은 제목 그대로 18가지의 역사서를 간추려 중국 원나라 학자 증선지(曾先之)가 요약한 것이다. 이는 초보적 역사 교과서로 중국 역사의 대강을 알 수 있는 책이다. 또 일반인에게는 중국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교재이기도 하다.
다음은 만화가 고우영(高羽榮)에 대한 소개다. 고우영은 중학교 2학년 때 단행본 만화 ‘쥐돌이’를 출간한 만화천재였다. 70년대에는 소년극화 ‘대야망’을 발표하며 한국만화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었고 곧이어 성인극화 ‘임꺽정’, ‘수호지’ 등을 발표하며 70~80년대 신문연재극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90년대 서사보다는 극화된 만화와 만화가들의 등장한다. 이에 발맞춰 ‘십팔사략’이 전작 단행본으로 기획된다. 기존의 서사방식과는 달리 후배들이 펼쳐가고 있던 대본극화 스타일을 염두에 두고 중국의 고대사를 일관된 역사적 흐름에 따라 전개해 낸 것이다. 이 작품은 연재 없이 5년에 걸쳐 단행본용으로 작업되었다.
고우영은 증선지의 십팔사략(十八史略), 사마천의 사기(史記)부터 탁극탁의 송사(宋史)를 원작으로 삼아 재구성하여 1권 삼황오제에서 서주까지, 2권 춘추시대, 3권 전국시대, 4권 시황제의 천하통일, 5권 항우 유방의 초한전, 6권 후한시대, 7권 조조 유비 손권의 삼국시대, 8권 남북조시대, 9권 당의 흥망, 10권 북송시대 남송시대까지의 새로운 제목과 고우영 특유의 유머와 해학으로 풀어낸 중국 역사를 풀어내었다.
관포지교의 관중과 포숙아, 병법의 대가 손무와 손빈, 초한지의 항우와 유방, 최초로 중국통일을 이룬 진시황제, 절세의 지략가 제갈량과 간웅 조조, 탐욕과 배신의 대표적 인물 동탁과 여포, 타고난 미모를 무기로 천하의 흐름을 바꾼 초선과 양귀비 등의 수많은 영웅호걸과 미인들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와신상담, 토사구팽, 계명구도, 완벽, 일모도원, 주지육림, 읍참마속, 부형청죄 등의 고사성어와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책이다.
더욱 우리 학생들에게 유익한 점은 중국 4천년의 역사의 단편들을 순서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전체적인 흐름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초한지’나 ‘삼국지’ 등을 통해서 항우와 유방, 유비와 조조 등 개별적인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나 그 인물과 사건의 앞뒤관계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이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십팔사략은 중국 역사 전체를 아우르며 연대별로 머릿속에 정리하게 한다.
게다가 이 책은 딱딱한 역사를 톡톡 뛰는 유머와 풍자로 재미를 더하고 있어 역사적 지식뿐만 아니라 재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일석이조의 책이다.
또한, 고우영의 십팔사략은 원전을 바탕으로 했지만 그대로 모방하지는 않았다. 고우영 화백 특유의 해학과 비틀기로 새롭게 원작을 재해석하여 전체적으로 통통 튀는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거기에 현실비판의 시선도 적당히 담아두고 있어 이 작품을 반드시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고만 치부하기 어려운 면을 지니기도 한다. 깔끔한 색채감이 넘치는 현대의 만화와는 사뭇 다르지만 인간들의 흥망성쇠와 과오와 반성을 작품 속에 꾸준히 드러내고 있는 깊은 인생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책이다. 이번 여름방학 때 피서지에서 혹은 고3이라면 수능준비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심심풀이로 읽다가 큰 대어(大漁)를 얻게 하는 책이 될 것이다. 〈고우영 지음 / 애니북스 펴냄 / 각권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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