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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15 격주간 제63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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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풀떼죽의 추억 |
특별기고 - 이영호(한국문인협회 상임이사) -
지난 일요일, 임꺽정의 활동 무대로 유명한 철원의 명승지 고석정을 다녀왔다. 래프팅의 명소로 뜨고 있는 한탄강의 급류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절벽의 조화가 명승지라는 이름에 걸맞는 곳이었다.
그런 아름다운 자연이 거기 있음도 고마운 일이었지만, 내 마음 한껏 기쁘고 들뜨게 한 것은 누렇게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는 철원 평야의 익어가는 벼논의 모습이었다. 지독한 폭우와 혹서의 재해를 이겨내고 풍성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들녘의 벼들, 그런 오늘을 마련하기 위해 땀 흘려 일한 농부들의 수고를 생각하니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그 엄청난 수마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아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땀 흘려 일한 댓가로 오곡백과가 풍성하게 익어가는 결실의 들판에서 수확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으니 이보다 큰 기쁨과 은혜로움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자연의 섭리는 결코 인간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는 나들이였다.
돌아오는 길에 밋밋한 언덕배기에 누렇게 익어가는 호박들을 보고 나는 차를 멈추고 한참 동안 호박에 얽힌 청소년 기의 즐겁고 흐뭇한 추억에 잠겼다. 가난한 농가의 8남매의 다섯째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소먹이는 목동이었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내내 논밭에 나가 머슴과 함께 김을 매거나 곡식을 수확하는 일을 돕는 작은 농부여야만 했다.
등에서 지게가 떠날 날이 없었던 바로 위의 형과 나는 한꺼번에 고학을 각오해야 하는 학업을 위해 집을 떠나야 하게 되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으로 10리길 농고를 졸업한 형은 국립대학에 합격하고, 중학을 졸업한 나는 진주의 사범학교에 합격하였던 것이다.
두 형제가 순전히 주경야독으로 치열한 입시 경쟁을 뚫고 일궈낸 합격이란 경사가 어머니에게는 조금도 기쁘고 반갑거나 대견한 일이 아니었다. 일손이 한꺼번에 둘이나 빠져나가게 되는 것만이 큰 걱정이어서 한숨만 쉬셨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우리 형제는 집을 떠나기 전에 뜻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집에서 1킬로쯤 떨어진 곳에 있는 우리 밭의 밋밋한 언덕에 호박 구덩이를 파고 퇴비와 똥오줌을 져 날라 채운 후 호박을 심기로 한 것이다. 넓은 밭 언덕에 수십 개의 호박 구덩이를 파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곳에 퇴비와 똥오줌을 져날라 채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형제가 집을 떠났던 그 해는 지독한 가뭄으로 흉년이 들었다. 그렇지만 거름을 넉넉히 넣고 심어놓은 호박밭에는 가을이 되자 수없이 많은, 누렇게 익은 호박이 시든 풀밭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수확한 볏섬으로 광을 채우지 못한 빈 자리에 우리가 수확한 호박을 채워넣을 수 있었고, 호박은 그 겨울 내내 모자라는 양식을 보충하는 양식으로 큰 몫을 했다.
겨울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와 있던 우리 형제에게 밀가루를 풀어서 호박풀떼죽을 쑤어 주시던 어머니가 대견해 하시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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