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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반 위에 쌓인 김밥은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길고 알록달록했다. |
요즘 영화 ‘겨울 왕국’ 주제가 ‘렛잇고(let it go)’가 폭발적인 인기다. ‘렛잇고(let it go)’는 그냥 내버려두란 뜻. 천만 관객을 동원하고 25개국 언어로 번역된 이 노래에 사람들은 왜 그토록 열광할까? 그 이유는 우리 모두 이렇게 외치고 싶어서일 것이다. ‘세상아 나를 내버려둬! 나를 놓아줘! 난 자유야!’
며칠 전 이 노래에 빠져 직장을 못간 적이 있다. 출근 중이었는데 이 노래의 가사를 보고 있다가 내려야 할 버스정류장을 지나버린 것이다. 허둥거리다 보니 버스가 한남대교를 넘어가는 게 아닌가. 돌아올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출근시간이라 차가 막히고 시간은 많이 지나 있었다. 그 순간 ‘렛잇고(let it go)’ 노래가 떠올랐다. 그래 나를 내버려두자! 난 자유야! 하루 회사 안 간다고 지구가 멈추는 건 아니니까. 스티브 잡스도 말하지 않았는가? “설사 잘 닦여진 길로부터 벗어날지라도 때론 자신의 마음을 따라가야 인생이 변화할 것이다!”
버스는 순천향병원을 지나 남산 1호 터널로 들어갔다. 몇 년 동안 내가 내리는 정류장밖에 몰랐던 나. 나를 내버려두자 길은 이어지고 새로운 정류장들이 보였다. 밖은 눈부신 봄날이었다. 옆에 달리는 관광버스를 보면서 나는 문득 바람처럼 자유로워졌다. 하루를 통째로 선물 받은 기분! 어디로 갈까 행복한 고민을 하다 명동 입구에서 내렸다. 빈속이라 명동에서 무언가 먹고 오랜만에 남산을 올라가 보기로 한 것. 출근시간에 명동을 어슬렁거리는 낯선 여유로움. 그건 여행자만의 특권이다.
이른 시간이라 문들이 닫혀 있는 좁은 골목 안에 간이역처럼 불을 켜고 있는 작은 국숫집이 보였다. 36년 전통이라고 써져 있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니 할머니가 김밥을 말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는 국수를 시켰다. 국물 맛이 깊고 개운했다. “할머니 참 부지런하시네요.” 라며 인사를 건네자 할머니는 36년 동안 많은 사람을 알게 된 게 재산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할머니는 전문학교를 나온 인텔리였다. 즐겁게 일하는 비법을 묻자 웃지 않는 사람은 장사하지 말란다. 할머니 소원은 구두 신고 일하다 죽는 것. 이 가게가 할머니에겐 서울대학교란다. 손님에게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부자가 되는 비결은 욕심을 버리는 것. 또 돈이란 혈관을 도는 피란다. 피는 깨끗한 피와 더러운 피가 있다고. 노인 한 명의 지혜는 도서관과 같다는 말이 있다. 사실 사람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처럼 깊고 감칠맛 나는 여행은 없다. 나는 빈 국수 그릇을 앞에 놓고 할머니는 김밥을 싸면서 우리의 대화는 유쾌하게 이어졌다. 김밥은 손이 싸지만 발에게도 매일 감사한다는 할머니. 할머니의 말씀은 등대처럼 내 속을 환히 비추어 주었다.
내가 아침부터 여기 오게 된 사연을 말하고 ‘렛잇고(let it go)’ 가사를 낭송해 드렸더니 할머니는 박장대소하며 꼭 다시 놀러 오라고 했다.
쟁반 위에 쌓인 김밥은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길고 알록달록했다. 나는 꽃을 사듯 김밥을 샀다. 길을 벗어난 덕분에 나는 어제와 다른 나로 변화할 수 있었다. 삶이란 정류장의 연속이다. 그리고 누구나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칠 때가 있다. 그럴 때 한 번쯤 용기를 내 ‘렛잇고(let it go)’ 를 외쳐보면 어떨까?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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