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을 다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정성스러워진다
自誠明 自明誠(자성명 자명성)
- 《중용(中庸)》 중에서"
‘배우다’, ‘공부하다’라는 의미를 영어로 표현하면 ‘study’ 혹은 ‘learn’ 정도가 될 것이다. 간단하게 하나의 단어로 해결된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다르다. 반드시 ‘학(學)’과 ‘습(習)’, 두 가지를 합쳐서 말해야 한다. ‘학습(學習)’이 하나의 단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2개의 의미가 묶인 개념이다. 학(學)이 ‘study’ 혹은 ‘learn’이라면 ‘습(習)’은 ‘training’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머리로만 안다고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몸에 익숙하게 만드는 훈련이 필요하다.
‘학습(學習)’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일반적이어서 미세한 이해를 가로막는다면 ‘효각(效覺)’으로 바꾸어 생각해보자. 동양에서는 ‘study’ 혹은 ‘learn’을 효(效)와 각(覺)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효(效)’는 따라하면서 배우는 것이다. 본받는 것이다. 대가가 그린 난초 그림을 그대로 따라서 베끼는 과정이다. 그렇게 꾸준히 하다보면 ‘아하!’하는 탄성이 터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경험해본 사람은 그 쾌감이 얼마나 크고 짜릿한지 알고 있다. 영어로 하면 ‘유레카(eureka)’ 정도가 될 것이다. 깨달음을 얻는 것, 그게 ‘각(覺)’이다.
효(效)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성스러움과 성실함이 중요하다. ‘엉덩이로 공부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루하고 따분하지만 그것을 참고 꾸준하게 이어가면 각(覺)에 이르게 된다. 그렇지만 그게 끝은 아니다. 또 배울 것이 많다. 그러므로 다시 효(效)를 시작해야 한다. 그런데 한번 ‘유레카’의 쾌감을 느낀 사람이라면 그 자세가 어떠할까? 처음보다 더 정성스럽고 더 성실해질 것이다. 느낌 아니까.
효(效)와 각(覺), 학(學)과 습(習)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침이 밝았다가 밤이 되는 것처럼, 겨울이 되었다가 봄이 오는 것처럼, 계속 이어진다. 그렇게 이어질수록 나는 점점 커진다. 우주의 끝까지 이어져 모든 것과 소통할 수 있게 된다.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중용(中庸)’에서는 “성실하게 정성을 다하면 드디어 밝게 알게 된다. 이것은 본래 타고난 바른 마음을 되찾았다는 것을 뜻한다. 밝게 알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성실하게 정성을 다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공부의 올바른 방법이다.(自誠明 謂之性 自明誠 謂之敎)”라고 설명한다.
인의예지(仁義禮智)도 마찬가지다. 율곡의 설명을 들어보자.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사계절과 같다. ‘인(仁)’은 봄이다. 따스하고 온화하여 새싹이 돋아난다. 따스한 마음으로 사람들을 감싸주어 서로 마음이 통하게 된다. ‘예(禮)’는 여름이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열심히 무성하게 자라난다. 꾸준한 연습으로 익숙하게 만든다. ‘의(義)’는 가을이다.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깨달음을 얻어 성숙해졌기에 올바른 결과를 이루어낸다. ‘지(智)’는 겨울이다. 모든 것을 이루어내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조용히 반성하면서 다가올 봄을 대비한다. 바른 마음으로 바르게 실천하는 과정 속에서 지혜가 쌓여 인(仁)이 무엇인지 바르게 깨닫고 더욱 겸손해진다.”
주자는 “이러한 법칙이 우주를 만들고 세상을 만들었다. 무수한 변화도 만들고, 변화를 통해 우주와 자연을 유지하게도 만든다. 사람도 그러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삶인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부분 부분을 세세하고 정밀하게 보는 것과 전체를 크게 보는 것을 겸해야 한다.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인의예지(仁義禮智)도 마찬가지다. 연결시켜 생각해야 한다. 변화하는 과정 속에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공부란 그것을 알아가는 삶의 기쁜 과정이다. ‘유레카’의 연속이다. 고통스러움이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의 연속으로 삶을 만드는 비법이 이것이다. 공자가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