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소통하여 아는 것이 ‘지(智)’다
通曰智(통왈지)
- 《통서(通書)》 중에서"
맹자가 강조한 인의예지(仁義禮智) 중에 인(仁)과 의(義), 그리고 예(禮)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니 이제 지(智)를 알아볼 차례다.
지(智)는 앞서 설명한 인(仁)과 의(義), 그리고 예(禮)에 비하면 이해가 그리 어렵지 않다. 지(智)는 바르게 아는 것이다. 어설프게 혹은 어슴푸레하게 아는 게 아니라 명확하고 정확하게 아는 것을 뜻한다. 어림짐작으로 아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아는 것이다.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몸에 습관으로 들러붙는 것을 말한다.
어린 아기가 엄마의 젖을 빠는 것은 어떠한가. ‘엄마의 젖을 빨지 않으면 죽는다. 그러므로 젖을 빨아야 한다. 엄마의 젖은….’이라는 분석을 거친 후에 젖을 빠는가. 아니다. 두뇌로 생각하기에 앞서 자동적으로 입을 가져간다. 본래 엄마와 하나의 몸으로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서로 통하는 게 있다. 그게 바로 진실로 아는 것이다. 후천적으로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더 넓혀서 생각해보자. 이 우주는 어떠한가. 우리는 빅뱅이 이루어졌을 때 만들어진 각종 물질과 에너지로부터 생명을 얻었다. 본래 우주 전체와 하나로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서로 통하는 게 있다. 우리는 우주 전체와 물질을 나누어 가진 사이다. 그러므로 서로 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모두 본래부터 이토록 ‘통(通)’에 능하다.
그런데 점점 자라나 다른 정보와 지식을 쌓으며 본래 가지고 있던 본능적인 앎의 감각을 잃고 만다. 몸이 알고 있던 것들은 다 버려두고 외부의 것만 가져와, 그것을 머리에만 채우려고 한다. 그러니 몸과 머리가 따로 놀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알아도 몸은 그것을 편안하게 따르지 않는다.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몸으로는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조화롭게,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본래 지니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만드는 게 바로 ‘지(智)’다.
여기서 송나라의 학자 주돈이(周敦, 1017 ~ 1073)의 설명을 들어보자.
“인(仁)은 모든 것을 사랑하고 존중해주는 마음이다. 의(義)는 올바름이고 마땅함이다. 예(禮)는 인(仁)과 의(義)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지(智)는 서로 소통하여 아는 것이다.(德愛曰仁, 宜曰義, 理曰禮, 通曰智)”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지(智)’에 대한 주돈이의 설명이다. 그는 ‘통(通)’이 바로 ‘지(智)’라고 말한다(通曰智). ‘통(通)’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통팔달(四通八達)’이 ‘통(通)’이다. 그 어디든지 막히지 않고 다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지식의 벽을 쌓아놓고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모르는 녀석들은 여기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말라!’라고 어깨에 힘을 주는 것은 올바른 ‘지(智)’가 아니다. 막히지 않고 서로 통하게 하는 게 ‘지(智)’다. 단순히 지식을 쌓는 것은 저급한 것이다. 책을 읽어 글쓴이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이 ‘지(智)’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과 마음을 터놓고 소통하며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손을 잡는 것 또한 ‘지(智)’다. 세상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게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게 바로 ‘지(智)’다.
바로 여기서 ‘인(仁)’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매우 영민한 사람일 것이다. 이전에 송나라의 학자 정호(程顥)가 설명한 인(仁)은 어떠했는가.
“의학 책을 보면, 손발이 마비되는 병을 가리켜 ‘불인(不仁)’이라고 말한다. ‘인(仁)’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처럼 적절한 표현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정호(程顥)가 설명한 ‘인(仁)’과 주돈이(周敦)가 설명한 ‘지(智)’는 이상하게도 닮았다. 맹자는 사람의 본래 마음을 ‘인의예지(仁義禮智)’, 네 가지를 들어 설명했다. 그런데 첫머리인 ‘인(仁)’과 꼬리에 위치한 ‘지(智)’가 이토록 비슷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음 회에서 그 이유를 명확하게 밝혀보자.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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