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심을 버리고 예(禮)로 돌아오는 것이 인(仁)이다
克己復禮爲仁(극기복례위인)
- 《논어(論語)》 중에서"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당하게 고통 받거나 어려움에 처한 것들을 안타깝게 여기며,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仁)과 의(義)다. 그런데 유학(儒學)에서 강조하는 것은 인(仁)과 의(義)뿐만이 아니다. 맹자는 “사람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다.”라고 말하며 그 근거로 사단(四端)을 제시한다. 사단(四端)이란 네 가지 씨앗을 뜻하는데, 그 씨앗에서 자라나는 것이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다. 인(仁)과 의(義)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을 했으니 이제는 예(禮)에 대해서 알아보자.
흔히 예(禮)라고 하면 예절을 잘 지키는 것이나 복잡한 예법을 잘 따르는 것을 머리에 떠올린다. 그러나 예(禮)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림 그리는 것으로 설명해보자.
동양화 중에 흔하게 볼 수 있는 그림 중 하나가 바로 난초 그림이다. 난초 그림은 번잡하지 않고 단순하면서도 매우 아름답다. 곧게 뻗은 잎의 기세와 고고한 자태는 보는 이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온다.
붓으로 한번 쭉 그어나가면 완성될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대가(大家)들이 그린 그림과는 그 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대가를 찾아가 “어떻게 하면 난을 잘 그릴 수 있는지 설명해주십시오.”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그는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 걸?”
어떻게 해야 할까. 난초 그림의 대가가 그린 그림을 보고 따라하는 게 그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가가 곁에 있다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직접 보면서 따라하는 것도 방법이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힘들어 쩔쩔맬 게 분명하다. 그러나 멋진 난초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의지가 강하다면 그런 것을 이겨낼 수 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다보면 대가가 그린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경지에 오를 것이다.
그때 대가를 찾아가 “제가 선생님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라고 말해도 그 대가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난초 그림이 아니라 단순한 복사물이기 때문이다. 복사한 것은 작품이 아니다. 대가에게 “이 난을 똑같이 다시 그려주십시오.”라고 부탁해도 이전에 그린 그림과 똑같은 그림은 나오지 못한다. 새로운 그림이 나올 뿐이다.
대가의 그림과 똑같이 그릴 수 있다 하더라도 대가가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저 따라하는 것에 불과하다. 현재의 상황에 어울리며, 그림을 본 사람들에게 “나도 저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라는 감동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난초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몸에 익숙해지면, 이제 대가가 그린 난초 그림은 버려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나의 몸과 마음이기 때문이다.
멋진 난을 그리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그렇기에 팔의 각도를 어떻게 하고 붓을 쥐는 손의 힘은 어떻게 조절하는지 등 구체적 데이터가 나오지 못한다. 그저 그때의 상황에 맞추어 내 마음을 적절하게 만들면 된다. 멋지게 그리겠다는 욕망 자체가 없이 편안하고 즐겁게 휙 붓을 놀리면 그게 멋진 작품이 된다.
대가가 난초 그림을 그리는 행위가 바로 예(禮)다. 훌륭한 사람들이 당시 상황에 적절하게 인(仁)과 의(義)를 밖으로 표현해내는 것이 예(禮)다. 그림은 행위가 남긴 부스러기일 뿐이다. 부스러기는 본질의 일부분일 뿐 본질 자체는 아니다.
공자가 “이기심을 버리고 예(禮)로 돌아오는 것이 인(仁)이다.”라고 말한 이유를 잘 살펴야 한다. 방점은 어디에 찍혀 있는가. 인(仁)에 찍혀 있다. 인(仁)과 의(義)를 적절하게 드러내는 행위 자체가 예(禮)다. 인(仁)과 의(義)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그림자만 따라하면서 예(禮)라고 우겨서는 곤란하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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