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15 격주간 제775호>
[이달의 착한여행] 겨울 분재, 그 침묵 속으로
"겨울 분재원은 조용했고 나무들은 저마다 아주 독특한 침묵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우연히 백운호수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분재원에 들른 적이 있다. 그곳은 식사가 끝난 후 커피를 마시는 장소다. 난 분재를 좋아하지 않는다. 좁은 우리에 갇혀 사지가 묶인 나무를 보면 왠지 외면하고 싶어진다. 겨울 분재원은 조용했고 나무들은 저마다의 시선을 내부로 고정하고 있는지 아주 독특한 침묵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침묵 사이로 걸어가다 걸음을 멈추었다. 생뚱맞게도 동전 크기의 빨간 열매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열매는 겨울을 거슬러 혼신을 다해 가지에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다.
그 열매는 볼이 빨간 단발머리 소녀였다. 먼 옛날 눈보라 치는 겨울밤 맨발로 뛰쳐나간 언니. 아버지가 머리를 잘라 방안에 가두자 십리 길을 달려 첫사랑을 찾아갔던 언니. 몇 달 뒤 나뭇가지에 매달려 생을 마감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난 아직도 그날 밤 울며 달려가던 그녀의 맨발을 기억한다.
그로부터 이십 년,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났다. 그것도 설악산 양폭대피소에서. 기막히게도 그는 언니 첫사랑의 남동생이었다. 같은 고향이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가 누구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 남자의 잘못은 아니지만 만감이 교차했다. 함께 갔던 일행도 참담한 사랑의 결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언니는 느닷없이 설악산에서 내게 온 뒤, 오늘 분재 속 붉은 열매가 되어 내게로 왔다. 때론 아픈 기억을 따라 뒤로 가는 여행도 있다.
한자리에 오래 서 있는 내게로 주인 여자가 다가왔다. “그건 사과예요.” 난 깜짝 놀랐다. 이렇게 작은 사과도 있다니. “다 시들어 죽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쪼그라들었던 열매가 이렇게 살아나더라고요.” 그녀는 자못 감동스러운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사과는 사연 많은 주인공 같다. 아담과 이브의 사과, 백설공주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언니의 하얀 맨발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돌아보니 석양이 비닐하우스 안으로 슬며시 들어와 나와 함께 분재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 순간 비틀리고 휘어진 겨울분재들이 환해졌다. 꽃의 이념도 잎의 사색도 열매의 희망도 놓아버린, 뼈마디가 훤히 보이는 강인한 아름다움. 그들은 비틀리고 휘어진 자신을 햇볕 아래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난 내가 껴입은 옷이 문득 무거워졌다. 앞으로도 제대로 한번 훌훌 벗어 던지지 못하리라.
적당히 타협하고 가리고 사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건 사랑이다. 사랑에 목숨 거는 일이 비난받을 일인가? 난 왜 언니를 어리석다 외면했던 것일까? 인생에 정답은 없다. 분재나 산속의 나무나 자신에게 정답이 있는 것. 동네에서 뛰어난 미인이었던 언니는 어두워질수록 빛나는 별처럼 오롯이 자신의 삶을 살고 갔다.
낮아지고 낮아지면서 밑동이 굵어진 분재 속에서 나는 키만 웃자란 잡풀처럼 외롭고 서글퍼졌다. 스토리 없는 긴 소설처럼 난 언니보다 수십 년을 더 살았다. 꽃은 이해타산 없이 무념무상으로 핀다. 단 한 번 마지막처럼. 언니는 그렇게 짧은 생을 살다 갔다. 난 사과나무 분재를 샀다. 그리고 사라진 언니를 가슴에 안고 먼 여행길에서 돌아오듯 분재원을 나왔다.  <김금래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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