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2-01 격주간 제774호>
[이도환의 고전산책] 인(仁)은 소극적인 게 아니다

"올바름을 따르는 것이 이익을 가져온다
義利之本也(의리지본야)
-《춘추(春秋)》중에서"


인(仁)은 소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소통이 인(仁)이라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타인의 아픔을 자기 아픔처럼 느끼며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 타인의 기쁨을 나의 기쁨처럼 느끼며 즐거워하는 마음이 곧 인(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것은 인(仁) 그 자체가 아니라 인(仁)의 씨앗일 뿐이다. 그러한 마음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 무럭무럭 자라나게 만들어야 한다.
우물가로 기어드는 아이를 보고 안타깝게 느끼는 것만 가지고서 인(仁)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드시 달려가 그 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행동해야 한다.
실천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아니다. 반드시 실천이 이어져야 한다.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선비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떠올리는가. 농사를 짓거나 열심히 일을 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방구석에 처박혀 ‘공자왈 맹자왈’하며 지내는 모습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쌀독은 비어 있는데, 그런 사사로운 이익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오직 올바름(義)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소인은 이익(利)에 대해서만 생각한다고 했느니라(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떠올리기도 할 것이다.
문장 구조를 얼핏 보면 올바름을 뜻하는 의(義)와 이익을 뜻하는 이(利)가 대비되어 있어 마치 그것이 선과 악처럼 상대적인 것이라고 곡해하기 쉽다. 그러나 공자가 강조하며 방점을 찍은 곳은 의(義)와 이(利)가 아니라 “오직 그것만을 생각한다.”이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전쟁터가 된다.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 이익만 챙기면 엉망진창이 되어 세상 전체가 쇠락해지고 암울해진다. 세상 전체로 판단하면 이익의 총량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면 이익 자체가 줄어든다. 이익을 추구했으나 결국 이익이 적어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가장 좋은 길은 어떤 길인가. 이익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다. 협조하고 협력하면 이익의 총량이 늘어난다. 고르게 나누어 갖고 공정하게 하면 결국 내가 가져가는 이익도 많아진다. 그렇기에 “올바름을 따르는 것이 이익을 가져온다(義利之本也).”가 지닌 의미는 매우 깊고 중요하다.
이익의 총량을 늘리는 것이 올바름(義)이다. 그것을 실제로 구현해내기 위해 실천해야 한다.
“군자는 올바름(義)에 대해서만 집중한다.”라는 말에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위와 실천이 포함되어 있다. 생산량을 늘려 풍요로운 세상이 될 수 있도록, 모두가 넉넉하게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군자다. 늘어난 이익을 공평하게 분배하고 공정하게 나누어가질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 군자다.
그렇다면 방구석에 처박혀 “세상일엔 관심이 없어요. 난 오로지 올바름(義)만 생각한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익만 밝히는 소인(小人)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군자도 아니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며 실천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인(仁)이라고 하면 ‘어질다, 인자하다’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그러나 인(仁)은 그렇게 하나의 개념으로 묶을 수 없는 것이다. 소극적인 것도 아니다. 내 몸을 살피는 것처럼 세상을 살핀다. 내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세상을 사랑한다. 내 몸에 가시가 박혀 있으면 정성을 다해 가시를 뽑아내는 것처럼, 세상에 박힌 가시도 뽑아내야 한다.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세심하게 살펴서 해결해내야 한다. 실천하지 않는 인(仁)은 싹을 틔우지 못하는, 죽은 씨앗일 뿐이다.
인(仁)은 항상 의(義)와 함께 해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사는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실천해야 한다.
불의(不義)에 맞서 용감하게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인(仁)의 길이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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