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선입견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살펴보라
以物觀物 無以己觀物(이물관물 무이기관물)
-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중에서"
“호랑이하고 사자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어렸을 때 흔히 하는 질문 중 하나다. 과연 누가 이길까?
호랑이나 사자라는 정보만으로는 판단 불가능하다.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나이는 어느 정도인지, 건강한지 병약한지, 싸우려는 의지가 강한지 아니면 약한지, 홈경기인지 어웨이경기인지도 따져봐야 한다. 그들을 살피고 그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봐야 판단할 수 있다.
나의 입장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 서서 관찰하고 생각해야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잣대만으로는 좌표를 구성할 수 없다. 넓게 퍼져나가는 횡설(橫說)과 위 아래로 뻗는 수설(竪說)이 갖추어져야 정확한 좌표를 만들 수 있다. 새가 두 개의 날개로 퍼덕여야 날아갈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내 생각과 관점만 갖고서는 안 된다. 그들의 생각과 관점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강요하는 게 아니다. 너의 생각과 나의 생각을 적절하게 결합하여 조화롭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토론은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게임이 아니다. 상대의 주장을 잘 듣는 게 토론의 시작이다. 그것이 진정한 학문이다.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한 계단 한 계단 꾸준히 오르다보면 체력도 강해지고, 그렇게 나를 단련하며 오르다보면 앞이 훤하게 트이는 곳에 도달하게 된다. 높은 곳에 도착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 사이에 이루어지는 체력단련도 중요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면 체력을 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훤하게 트인 곳에 도달하더라도 앞에 펼쳐진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계단을 오르다가 다시 내려가는 것을 반복하면 체력은 강해질지 모르지만 훤하게 트인 곳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도착과 단련,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적절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진리 앞에 도달하더라도 그게 진리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는 게 공부다. 타인을 이해하고 자연을 이해하고 우주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지 깨닫게 된다.
공부를 할 때는 모든 것을 환하게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끝까지 나아가야 한다.
환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비우고 책을 읽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며 책을 읽으면, 옛사람들의 말을 끌어다가 자기 생각의 근거로 사용하려고 노력하며 책을 읽으면, 엉망이 된다. 그것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향해 연설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한다.
유학(儒學)에서 공부의 목적은 스스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다. 성인(聖人)이라고 할 때 사용되는 성(聖)이라는 글자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귀(耳)가 가장 먼저 나온다. 그 다음에 입(口)이 나온다. 먼저 들어야 한다. 그 다음에 말하는 것이다.
듣는 것을 한자로는 청(聽)이라고 쓴다. 글자 모양을 잘 살펴보자. 맨 먼저 귀(耳)가 나온다. 그 옆에 ‘얻는다’는 의미의 득(得)이 있고 그 아래 마음(心)이 있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여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덕(德)이다.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게 덕(德)이고, 그렇게 잘 듣는 게(聽) 공부의 과정이며, 그것이 익숙해지면 성(聖)이 된다.
“마음을 활짝 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라. 너의 관점과 생각은 뒤로 미루어 두고,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여라(放寬心, 以他說看他說. 以物觀物, 無以己觀物).” 송나라의 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의 말이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라고 잔소리하는 게 유학(儒學)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듣는 게 먼저다. 말 많은 사람은 허학자(虛學者)다. 잘 들어주는 사람이 실학자(實學者)다.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이 성인(聖人)이다.
새해가 시작된다. 새해에는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들어라. 선입견 없이 보라. 그게 학문의 시작이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