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橫說竪說)’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을 보면 “말을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하다, 두서가 없이 아무렇게나 떠들다.”라고 나온다. ‘술에 취해 꼬부라진 혀로 횡설수설한다.’라는 용례도 있다.
그런데 율곡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엮어낸 위대한 책 ‘성학집요(聖學輯要)’ 제1편 ‘통설(統說)’에 이 말의 뿌리가 보인다. ‘통설(統說)’의 ‘들어가는 말’ 부분을 읽어보자.
“성현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聖賢之說) 때로는 횡(橫)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수()로 말하기도 합니다(或橫或). 체(體)와 용(用)에 대해 더불어 다 함께 이야기한 것도 있고(有一言而該盡體用者) 그 중에 하나의 실마리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것도 있습니다(有累言而只論一端者). 여기서는 두 가지를 모두 이야기하는 부분만 모아 첫머리로 삼았습니다(今取體用摠擧之說 爲首篇).”
횡(橫)은 가로를 뜻한다. 좌우로 길게 늘어뜨리는 것이다. 수(竪)는 세로를 뜻한다. 위 아래로 곧게 세우는 것이다. 율곡은 횡(橫)과 수(竪)에 대응하는 것으로 체(體)와 용(用)을 말한다. 거칠게 말한다면 체(體)는 본질이고, 용(用)은 그 쓰임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율곡의 글을 다시 정리하면 이 정도가 될 것이다.
“성인(聖人)들과 훌륭한 선배 학자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때로는 바른 이치의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것의 활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나의 문장 안에 그 모든 것을 다 포함하여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느 한 가지에 대해서만 말하기도 합니다. 그 중에서 두 가지를 모두 이야기하는 부분만 모아서 제일 앞부분에 배치했습니다.”
이제 다시 돌아가 ‘횡설수설(橫說竪說)’에 대해 생각해보자.
높은 이상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높은 이상도 없이 그냥 때에 따라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도 잘못이다. 눈이 쌓인 미끄러운 들길을 걸어간다고 생각해보자.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멀리 앞을 내다봐야 한다.
그러나 발밑을 살피지 않으면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게 된다. 발밑만 살피며 걸어가면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멀리 내다보지 않으면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발밑을 살펴 넘어지지 않게 함과 동시에 멀리 내다보며 방향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방향을 잃지 않기 위해 멀리 내다보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횡설(橫說)이라면 넘어지지 않게 발밑을 살피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수설(竪說)이다.
또는 그 반대라고 해도 무방하다. 어느 한 가지만 가지고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이처럼 이상과 현실, 본질과 그 활용을 더불어 추구해 나아가는 게 유학(儒學)이다.
자신을 바르게 갈고 다듬는 게 ‘수기(修己)’다. 그런데 자신을 바르게 가다듬는 목적은 나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아가게 하는 게 목적이다. 그것이 ‘안민(安民)’이고 ‘치인(治人)’이다. 나 혼자 잘 살기 위한 ‘수기(修己)’는 잘못이며, 나는 엉망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라고 간섭하는 ‘치인(治人)’도 잘못이다.
율곡이 ‘성학집요(聖學輯要)’ 제일 첫머리에 놓은 ‘통설(統說)’은 횡설(橫說)과 수설(竪說)을 통합(統合)한 설(說)이다.
그러므로 ‘횡설수설(橫說竪說)’이다. 그런데 공부가 깊지 못한 사람들은 율곡의 이러한 설명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라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횡설수설(橫說竪說)’은 학문의 최고봉이다. 이상과 현실을 씨줄과 날줄로 삼아 엮어내는 멋진 모습이다. 이상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석학의 경지다. 오늘날 사용하는 단어와 고전 속에 등장하는 단어는 그 의미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매우 많다.
〈이도환 / 아동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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